Send Help라는 원제를 <직장상사 길들이기>로 번역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요즘 영화들처럼 원제 음차 그대로 <센드 헬프>라고 개봉했으면 영화 예고편조차 볼 생각이 안 들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직장상사 길들이기>라는 제목도 이게 로코물인지 <퀸카로 살아남는 법> 같은 하이틴물인지 전혀 예상이 안 가서 좀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제목보다 더 어울릴 제목은 없을 것 같았다.
포스터부터 까맣고 벌겋고 피 칠갑에 난린데 제목만 보고 로맨스 영화로 착각하고 예매하는 사람은 없길.
![[크기변환]common (1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2/20260204181516_ucoxalgr.jpg)
레이첼 맥아담스가 로맨스, 드라마, 하이틴 등 다양한 장르를 찍었어도 이렇게 대놓고 B급 영화는 찍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애초에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 그런지 기존 이미지가 거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애청자인 너드면서도 광기 있는 역할도 잘 소화할 줄 몰랐다. 일에 치여 사는 회사원 린다 역할에 맡게 최대한 초췌하게 나오는데 방심하면 원래 알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예쁘게 나와서 웃음이 나왔다.
영화에서 나오는 배경이라고는 사무실 잠깐, 비행기 잠깐에 다 섬 밖에 안 나오는데 레이첼 맥아담스와 딜런 오브라이언 연기가 다 했다. 자기가 무시했던 부하 직원인 린다와 둘만 생존해 무인도에 갇히게 되면서 린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할 줄 아는 건 없으면서 존심만 세우는 낙하산 상사 브래들리가 해탈해서 웃는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극장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린다의 실적을 가로채는 남자 직원 도노반은 외형부터 성격까지 딱 슈렉에 나오는 프린스 차밍 같았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골프가 남자들의 허세로 취급되는 스포츠인 건 만국공통인가보다. 린다가 승진에서 누락될 걸 알게 되자 브래들리의 방에 찾아가는데 린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스윙하는 시늉을 한다. 이때까지 봐온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스윙질을 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성격이 생각났다.
![[크기변환]common (1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2/20260204181900_mtxyhcvf.jpg)
린다가 생존 스킬을 알려 달라 해서 다 알려줬더니 뒤통수를 치고 뗏목을 엮어 탈출하다 실패한 브래들리를 묶어놓고 이 섬에서 누가 서열이 더 높은지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그러면서 다정함을 약함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감명 깊게 느낄만한 대사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낙하산으로 CEO 자리에 앉아 능력 좋은 직원인 린다보다도 자기한테 아부 떨고 같이 골프 치러가기 좋은 남자 직원 먼저 챙기고 린다에게는 대놓고 면박을 주던 사무실에서의 브래들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교훈처럼 느껴졌다. 나도 누군가가 내게 보인 친절과 다정함을 얕잡아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만든 영화는 아니겠지만 수영이라든지 뭔가 생존 스킬 하나쯤은 배워놔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좀 덜 더럽고 가벼운 순한 맛 <슬픔의 삼각형> 느낌이었다. <슬픔의 삼각형>과는 다르게 생존자가 둘 밖에 없어 완벽하게 갑을관계가 뒤집힌 블랙 코미디는 아니었지만 섬에 표류되고 여성이 바깥일을 하고 남성이 여성의 리드에 따르는 가모장적인 스토리라인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중간에 놀란 부분이 좀 있어서 약간의 공포 요소가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크기변환]f5ad6549094bb624431495165f2736f7f829c5d35feab3c89cb04fae0ac2cc8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2/20260204182700_ixgmvmbu.jpg)
태국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사고로 같이 탄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에서 좀 잔인한가? 싶더니 멧돼지 사냥 장면부터 피를 뿜어대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연출이 슬금슬금 시작되고 섬에서 서로 통수를 치면서 난장판이 될 때 절정을 찍었다. 실컷 이런 상황을 연출해놓고 설마 갑자기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사이좋게 섬을 빠져나가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아주 편안한 결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다른 관객들의 대화를 살짝 듣게 됐는데 살다 살다 이런 영화는 또...라는 말에 웃어버렸다. A급 출연진이랑 감독 이름을 믿고 보러 왔더니 B급 영화가 나오면 당황스러울 만도 하다.
개봉한지 이제 일주일 정도가 됐는데 벌써 상영하는 곳이 줄어들어 아쉽다. 내가 요즘 도파민이 부족하다, A급 배우들과 감독이 만든 휘몰아치는 웰메이드 B급 영화가 궁금하다면 <직장상사 길들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