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되기 직전,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 다녀왔다. 그 어린 날의 여행이 내게 알려주었던 건 셀 수 없이 많을 테지만, 개중 가장 선명한 건 미술관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름을 줄줄 대면 다들 알 법한 그곳들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한 건 반쯤의 의무감과 반쯤의 호기심이었지만, 그때 나는 비로소 미술 작품을 향한 걸음마를 떼게 된 것 같다.
그 이후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땐 늘 가까운 미술관을 찾는다. 아직 가본 곳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몇몇 도시의 미술관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방식보다는 마음이 앞선 ‘입덕’이었기에 정석적인 향유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방식으로 작품을 보고, 텍스트를 곱씹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미술관 안을 하염없이 거닐곤 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가장 마음이 붙는 곳은 아무래도, ‘국현미’라고 불리는 국립현대미술관일 테다. 나는 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잘 이해하고 싶었고,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학습을 거친 것은 아니기에, 해석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우진영 연구원이 쓴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만났다.
책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에서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전공한 작가 우진영이 한국, 특히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현대 미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비슷한 맥락의 해석을 두고 시간 차이가 나는 두 작품에 대한 비평이 이뤄진다.
‘나와 당신의 도시’, ‘경계선 위의 존재들’, ‘계절을 통과하는 감각’, ‘내면의 소용돌이’, ‘삶에 흐르는 이야기’ 총 5부의 주제로 분류되어 작가가 풀어낸 이야기들은 딱딱한 지침서보다는 작품 너머의 눈을 뜨게 해주는 설명서에 가깝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의 시선과 감각이 잔뜩 가미된 설명 뒤로, 작품을 마주한다. 그때만큼은 이 책만이 만들어낸 미술관에 서 있는 감각이 든다.
서술자의 짧은 호흡의 감상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 편 한 편을 넘길 때마다 작품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전시관에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라 호흡이 가빠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애정이 어린 시선의 해석을 아주 올곧이 접할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귀한 경험이다. 그렇게 마주한 작품에서 그의 시선에 따라 한 번을, 그리고 나의 시선에 따라 한 번 작품을 꼼꼼히 살펴본다.
각각의 이야기에 따라붙은 현대미술가들의 인터뷰도 인상 깊다. 근대 미술 부분에 든 작가들의 귀와 입을 다시 열어낼 순 없기에 현대의 이야기만을 들을 수밖에 없지만, 근대, 현대를 거쳐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작품의 세계를 가만히 지켜본다.
가령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분투하는 도시에서’라는 주제로 문우식의 <성당 가는 길>과 민준홍의 <유토피안 콤플렉스(Utopian Complex)>을 본다. 1950년대의 서울과 2020년대의 서울을 그린 작품이기에 시간대가 다를뿐더러 표현 방법과 방식이 무척 다른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자세한 설명 뒤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의 지향점이자 장점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47명의 작가의 이야기를 다 들여다본 뒤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작가의 말인 프롤로그를 읽었다. ‘예술’적인 것들을 흠모했던 어린 시절의 작가에게서 미술관을 정처 없이 떠돌던 나의 얼굴이 비치는 것 같다. 어쩌면 예술을 흠모하는 우리의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이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미술관을 거니는 우리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