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게 시간이던 어린 시절에는 약 20시간의 플레이타임을 가진 게임을 마무리하면서도 너무 짧다고 투덜대고는 했다. 좋아하는 게임은 엔딩을 보기가 싫어 100시간을 투자하고도 마지막 메인 퀘스트를 남기고 오픈 월드만 한참 돌아다녔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런 패키지 게임을 지속적으로 플레이하는 게 피곤해진 걸까. 몸이 지친 탓일까? 게임 하나를 사더라도 며칠이면 흥미가 떨어져 금세 그만두고는 하는데다, 일주일만 지나도 그동안의 스토리를 전부 잊어버리고 만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남은 시간동안 향유하기를 선택한 매체는,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되었다.
AAA 게임, 즉 대형 게임사의 게임은 비싼 가격에 걸맞는 긴 플레이타임을 위해 시선을 이끄는 화려한 그래픽과 방대한 스토리, 넓은 맵, 더 어려워진 보스전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전보다 게임 소비가 줄게 된 나에게 있어 수많은 콘텐츠들은 부담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시작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어려워진 것이다. 반면에 인디 게임, 그 중에서도 짧은 플레이타임을 가진 게임은 덜 피로하게 느껴졌다. 하루 안에 엔딩을 볼 수 있는데다 그 끝도 물론 명확하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3시간 안에 몰아서 달려 완주하고 나면 만족감을 느끼는데다 성취감까지 더해진다. 게임에 푹 빠져 밤을 새고 난 후의 아침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새벽을 맞기 전 엔딩을 볼 수 있을 테니.
「도넛 카운티(Donut County)」(2018)
가끔 변기 속에 무언가 넣고 내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대체로 잡생각이나 해야할 일 같은 실체가 없는 것들을. 물론 그 속으로 들어간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배수관 속으로 흘러가는 것뿐이지만, 레버를 내리는 것이 관념적으로는 ‘없어진다’고 다가오기는 하니까. 「도넛 카운티」에서는 그 역할을 작은 구멍이 한다. 마을 주민들은 라쿤 ‘BK’가 운영하는 도넛 가게에서 도넛을 배달시킨다. 그런데 도넛 대신 존재하는 모든 물체를 집어삼키는 ‘구멍’만 왔다!
플레이어가 하는 일은 매우 단순한데, 그저 구멍을 조종하기만 하면 된다. 작았던 구멍은 오브젝트를 집어삼키며 곧 건물을 삼킬 수 있는 크기로 자라난다. 해당 필드에 있는 모든 오브젝트를 사라지게 만들면 한 챕터를 끝낼 수 있다. 챕터를 클리어할 때마다 나오는 스토리에서는 구멍 속으로 빠뜨린 마을 주민들이 나갈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며 블랙코미디 섞인 만담을 건넨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상호작용이 필요한 퍼즐이 등장하지만, 엔딩까지 큰 어려움 없이 한 번에 클리어할 수 있다. 피지컬을 요구하는 구간 또한 두어 번의 시도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단계를 깰 때마다 나오는 오브젝트에 대한 농담조의 설명들은 수집하는 재미가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나와 닮은 것 같은 ‘강 물고기’.
물고기는 비밀을 지킬 수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하니까.
「제목 없는 거위 게임(Untitled Goose Game)」(2019)
다양한 방법으로 남을 괴롭히며 즐거워지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이 게임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 더 이상 말썽꾸러기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이 갑갑하다면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당신을 위한 도피처가 되어 줄 것이다. 플레이어로서 거위가 되어 마을 주민들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고, 꽥꽥 울어 그들을 놀래키고, 날개를 마음껏 퍼덕여 보자!
이 작품은 할 일 목록에 있는 주요 미션을 클리어하면 다음 구역으로 갈 수 있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잠입 퍼즐 게임인 만큼 마을 주민 몰래 물건을 가져가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나도 다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심하게 복잡하지는 않기에 플레이어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러 가면 된다. 시리어스 계열의 잠입 게임은 조금만 들켜도 미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의 시련이 닥쳐오는 반면,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귀여운 수준.
찰흙덩어리 같은 단순한 질감의 그래픽은 인식하기 편한데다 귀엽기까지 하다. 쉬운 조작을 통해 얻는 주민들의 반응은 즉각적인 재미를 불러일으키고, 할 일 목록을 처리하는 것은 성취감을 가져다준다. 컴팩트하고 가벼운 게임이지만 매력적인 소재와 괜찮은 완성도를 갖췄기에 발매된 후 올해의 게임 상 2관왕을 쟁취하기도 했다.
「도넛 카운티」와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쉬운 난이도, 단순한 조작과 짧은 플레이타임을 지녔으나, 이 특징들이 장점으로 여겨진다. 복잡한 시스템이나 장기적인 목표 없이도 즉각적인 즐거움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장난스러운 사운드 트랙은 재미 요소로 작용하고, 파스텔톤의 미니멀하고 아기자기한 3D 그래픽은 편안함을 불러일으킨다. 출시된 지 6~7년이 지났음에도 낡지 않은 두 인디 게임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