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처럼 주어진 삶의 배역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다른 역할로 살아간다. 직장 동료이면서 친구이고, 가족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나'로 존재한다. 역할 사이를 오가다 보면 문득,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일까' 하는 질문이 고개를 든다. 타인이 보는 '나' 역시 온전한 모습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싶어 하고, 또 나를 정의하려 애쓴다. 바로 이 모순과 흔들림을 정면에서 다루는 소설이 위수정의 장편 『fin』이다.
* 『fin』은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시리즈'의 쉰여섯 번째 책으로, 2024년 현대문학 10월호에 발표된 중편을 바탕으로 퇴고해 펴낸 작품이다.
무대 위의 네 사람, 그리고 역할이 만든 서로의 얼굴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의 무대에서 시작된다. 기옥은 메리 역으로 재기에 성공한 배우로, 무대에 오를 때만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장막이 내려가는 순간 다시 자기를 잃어버린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의 옆에는 매니저 윤주가 있는데, 윤주는 기옥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사랑과 질투, 연민, 파괴 욕구가 충돌하는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자신을 잃어간다.
영화배우로 성공했다가 연극으로 돌아온 태인은 알코올 중독과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본능에 몸을 맡긴다. 그의 매니저 상호는 배우가 되고 싶었으나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한 사람으로, 태인의 성공을 동경하면서도 그의 폭력성과 허영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탓에 증오와 분노를 함께 키워온다. 이들의 관계는 선망과 경쟁, 모멸과 열등감이 뒤엉킨 '역할의 비틀림' 그 자체다.
역할이 본모습을 잠식할 때, 우리는 누구인가
작품의 중심에는 '역할과 본질'의 질문이 있다. 기옥은 무대에서만 살아 있다고 느끼고, 윤주는 지키는 역할의 경계에서 방향을 잃는다. 태인은 "추한 행동이 곧 본심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깨닫지만, 그것이 자기 진짜 모습이라 믿을 수 없다. 상호는 욕망하는 삶과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직장에서의 나,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내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혹은 그 진짜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윤주가 기옥을 보살피면서도 "해치고 싶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는 괴물이 된 것일까"라고 묻는 것처럼, 사랑과 폭력, 헌신과 증오, 이해와 오해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특히 태인의 질문 "본질과 본심은 다른 건가요?"는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단 한 번의 실수를 그 사람의 본질이라 단정 짓기 쉽지만, 소설의 인물들은 말과 행동이 때로는 가장 '멀리 있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주어진 역할이 그 사람을 잠식하고, 시간이 지나면 역할이 곧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관계의 맥락을 빼고 이해란 가능한가
우리는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하려 하지만, 사실상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모른 채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소설은 진심을 꺼내 상대에게 닿기까지의 거리감, 그 미묘한 실패의 감각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 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지만 내가 가진 역할의 틀 때문에, 혹은 상대가 가진 틀 때문에 서로를 끝까지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상대를 이해하려 하고, 이해받고 싶어 한다. 『fin』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소설의 전환점은 태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인물들을 비극으로 밀어넣지만, 동시에 각자에게 남은 역할을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 기옥은 불안과 공허 속에 흔들리고, 상호는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윤주는 기옥을 지키겠다는 마음과 무너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라진다.
이 모든 감정은 '삶은 연극처럼 끝나지 않는다'라는 문장과 연결된다. 삶은 반복적이고 불완전하며, 죽음조차 끝이 될 수 없다는 지적처럼,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끝내고 싶어 하면서도 끝낼 수 없다. 그럼에도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화자는 "나는 내가 타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비명이자 환호"라고 말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fin』은 배우라는 직업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보여주지만, 동시에 모든 독자에게 '삶에서 맡은 당신의 배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갖고, 때로는 그 역할 속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타인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해 오해를 만들고, 자신의 역할 때문에 진짜 마음을 숨기기도 한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지만, 그렇기에 계속해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 자체가 삶을 이어가게 한다.
관계의 진실은 완전한 이해에 있지 않다. 서로의 역할을 인지하고, 그 틈 사이에서 보이는 작은 진심을 붙잡는 데 있다. 이 소설은 역할이 만든 얼굴들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게 만들며, 그 얼굴 너머의 존재를 더듬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남긴다. 삶이 연극이라면, 우리는 매 장면의 막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서로의 역할 너머를 보려고 하는 마음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