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자기소개는 언제였더라? 어른이 된 이후로 나 자신을 직접 소개하지 않게 되었다.
이름과 나이, 출신지 같은 표면적인 것들이 아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시간이 없어진 기분이다. 알파벳 몇 자의 성격 유형이나 궁금하지도 않은 몇 줄의 이력들은 온전히 나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세 명의 캐릭터를 통해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조금은 웅크려 있고, 서툴고, 조용한 캐릭터지만 어쩐지 나는 이들과 닮아있고, 닮고 싶다.

즐거운 상상 속 월터 미티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 월터 미티는 멍하니 상상에 잠기는 버릇이 있다. 사소한 상상부터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이르기까지, 월터의 머릿속에서는 다채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멍하니 시간을 버리는 짓일지 몰라도, 나는 어쩐지 월터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상상이라는 행위는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도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많은 것을 투자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시뮬레이션은 일상 속 사소한 부분들을 즐겁게 채워나간다. 지루한 일상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상상과 그를 실천하는 일이다.
그러한 면에서 월터는 단순한 몽상가에 그치지 않는다. 월터는 결정적인 순간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실행력과 결단이 있는 사람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들을 몸소 체험하고 이루는 결말을 맞이한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상상일지라도, 그것을 실천해 내고, 자신의 원동력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월터가 좋다. 상상은 현실도피가 아닌 성장을 위한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창조하고 길을 찾아갈 수 있기에 머리는 쉬지 않고 생각들을 쏟아내고, 그 상상을 통해 성장하는 월터와 나는 어딘가 닮아있다.

'어쨌든' 해내는 신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캐릭터를 대표한다. 죽고 싶다고 말하지만 죽을 용기는 없는, 매번 끝없이 선택에 대한 고뇌에 휩싸이는 신지는 답답한 캐릭터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 캐릭터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 없다.
신지는 나와 닮아있는 캐릭터다. 일과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신지를 두렵게 한다. 신지에게는 단지 두렵다, 무섭다, 헷갈린다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망설임이 있다. 그러나 신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만다. 모든 것이 신지의 자의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몫을 해낸다는 것이다.
신지는 항상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캐릭터다. 그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수많은 상황에서 신지는 도망치고자 하지만, 결국에는 떠나는 기차에 타지 않는다.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되돌아오는 것을 선택한 신지. 기차역에서 돌아오는 신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신지의 방식은 곧 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과 내 곁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 내성적이고 섬세하기에 타인의 감정을 더 깊게 헤아리는 모습. 그 자리를 지키는 것. 때때로 이런 점들은 스스로를 상처받게 하지만 나는 신지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조로움과 단단함의 사이, 염미정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염미정은 굉장히 단조로운 캐릭터다. 염미정은 말이 없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 미소를 짓지도, 귀찮은 일이 있다면 그만두고자 한다. 그래서 미정은 무뚝뚝하고 까칠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나는 미정이 침묵을 좋아한다. 하나씩 신경 쓰다 보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세상의 소음 대신 본질을 응시하는 미정이 좋다. 미정의 침묵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신만의 방어기제이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그로 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감정과 마주하는 삶의 태도를 닮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정은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단단한 주관을 지키려 노력하고, 이는 작품의 제목인 ‘해방’과 연결된다. 조용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며, 마음을 주기로 결심한 대상을 끝까지 믿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싶다. 미정은 나를 대변하는 캐릭터보다는 내가 닮고 싶은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가장 닮은 세 명의 캐릭터는 어딘가 묘하게 닮아있다. 나는 이 세 캐릭터가 소란스럽지 않게, 자신만의 속도로, 결국에는 틀을 깨고 나온다는 점이 좋다. 나 역시도 이들처럼 조용하게 성장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낯부끄러운 자기소개 대신, 단조롭고도 솔직한 세 명의 이름을 빌려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