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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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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메리골드라는 꽃의 꽃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능력자인 지은은 석양이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지은은 엄마가 좋아하던 메리골드와 이름이 동일한 아름다운 도시에 세탁소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지은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얼룩을 지워주는 세탁소를 피워내게 된다.

 

메리골드를 이용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메리골드의 꽃말에서도 나왔듯이, 행복은 반드시 올 수 있을까. 마음의 얼룩을 지우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행복이란 무엇일까?’책을 읽으며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릴 둘러싼 세상과 마음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렇다면 세상과 마음은 무엇일까? 지은이 누구에게나 말하는 대로, 믿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준 것처럼, 나도 이 말에 힘입어 기존의 추상적 단어를 새롭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정의해 본다. 물론 내가 내린 답이 오답일 수도 있다.


“답을 틀리면 영원히 틀린 답인 줄 알았어요. 인생에 정답이 영원히 하나인 줄만 알고 살았습니다. 종이가 구겨져도 괜찮고, 다시 써도 괜찮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마음세탁소의 손님 중 한 명인 영희가 시를 써서 제일 좋은 점이 있다는 걸 알려주면서 해 준 말이다. 이 말에 힘입어 나만의 단어로 여러 질문들에 답을 내리려한다.


우선, 세상과 마음의 구성요소를 고대 철학자가 제시한 만물의 근원을 이용해 사유해본다. 두 번째로는 뇌를 새로운 단어로 은유하고, 뇌의 활동에 의인화를 해본다. 세 번째로는 감정을 기존과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본다. 이후엔 행복의 정의와 행복의 의미를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론 행복이 잘 포착되고, 발견되는 조건을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세상과 마음의 구조를 살펴보자. 헤라클레이토스는“만물의 근원은 불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불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질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이다. 불은 연소라는 변화를 통해 생성된다. 연소가 되기 위해선 산소와 불이 탈 소재가 필요하다. 연소는 빛과 열이 발해 불이 나는 것이다. 빛과 열 둘 중 하나가 없어도 불은 되지 못한다. 나는 세상과 마음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불의 구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불이 필수불가결하고 밀접하게 연결된 빛과 열로 이루어진 것처럼 세상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서로 붙어 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의 객관적이고 실제의 모습에‘나’라는 주관이 합쳐져 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객관과 주관 두 요소 중 하나라도 이상이 있다면 세계가 다르게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름다운 객관 자체가 존재할지라도 그 객관을 받아들이는 주관의 인식 수준이 낮다면 나의 세계는 객관에 비해 초라해진다. 주관의 상태가 피폐해져있다면, 성능이 나쁘거나 먼지 낀 카메라 렌즈로 세상 풍경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멋진 객관이 존재할지라도, 멋진 객관과 전혀 다른 나의 초라한 현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객관과 주관의 조화와 협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주관에 포함되는 마음의 작용도 이성과 감정이라는 서로 뗄 수 없는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객관과 주관의 협동이 중요하듯, 인간의 뇌에서도 이성과 감정의 조화와 협동이 개체의 삶의 질을 높이게 된다.


이번엔 인간의 뇌를 살펴보자. 나는 뇌를 일종의 지휘통제실이라고 새롭게 불러본다. 인간의 뇌라는 지휘통제실 안에서도 서로 붙어있는 두 부분이 있다. 바로, 지휘통제실장과 지휘통제부관이다. 지휘통제실장은 본능, 지휘통제부관은 이성이 담당한다. 이 둘은 인간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며 우리의 인격과 신체를 지켜준다. 나는 지휘통제실장을 본능 실장, 지휘통제부관을 이성 부관으로 명명해본다. 본능 실장은‘나’의 생존, 번영, 양육 등의 주요 생존 정보를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바로 손을 떼는 것은 본능 실장이 화상위험이라는 정보를 받아 몸에게 명령을 내려 활동하고 있는 증거다. 본능 실장은 평상시 생존 요령 책자를 보며 우리 몸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땐 무의식 Hot-line을 통해 신체에 즉각적으로 명령한다. 본능 실장은 우리의 무의식을 담당함으로써 인간의 욕망, 생존 의지를 행동의 원인으로 활용한다.


이성 부관은 정보를 해석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우리에게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지 판별한다. 이성 부관은 평상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잘한 판단부터 높은 차원의 지성이 필요한 것까지 의식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성 부관은 생각이 많고 사려가 깊다보니 본능 실장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느리다. 또한 인류가 태어난 시점부터 본다면, 근속일수는 본능 실장이 이성 부관보다 훨씬 많다. 사실 이성 부관은 본능 실장의 명령에 의문을 가진다. 아무래도 본능 실장이 연식이 더 오래되어서인지 이성 부관은 이해할 수 없는 고착된 행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과거 인류에만 크게 통했던 생존 의지, 욕망, 습관을 부추기며 현대에 맞지 않는 오작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5년 동안 만든 영화가 실패해 더 이상 영화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재하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첫사랑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잊지 못해 슬픔을 계속 간직하며 속을 곪았던 연희도 이성 부관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재하, 연희의 본능 실장이 이성 부관과 소통 없이 무의식한테 불안감, 슬픔이란 감정을 불러일으켜 생존 이상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한다. 과거엔 개체가 집단의 사회적 인정을 받고, 남녀 간의 번식을 위한 사랑이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성 부관은 본능 실장을 이해하기 위해 감정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이성과 감정의 조화와 협동으로 마음을 이루고, 본능의 오작동을 보완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성 부관의 깨달음처럼 이성과 감정이 마음을 잘 이루어야 본능을 이해할 수 있고, 본능 기저에 있는 욕망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니 본능과 이성은 서로 완전히 다를 거 같지만 사실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생존에 필요한 정보의 근원을‘느낌’, 즉‘감정’에서 찾는 것이다. 사실 지휘통제실에 본능 실장과 이성 부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휘통제실 벽면에 수많은 CCTV 화면이 있다. 바로 몸의 상태를 보여주는 화면들이다. CCTV화면에 우리 몸의 상태가 나타나기 위해선 감정이 있어야 한다. 감정은 일종의 카메라 렌즈다. 또, 감정이란 렌즈 위에 얇은 막이 씌어져있다. 이 얇은 막은 영혼이다. 얇은 막은 우리의 성격이 되어버린 습관, 순간의 기분, 다양한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능 실장과 이성 부관은 자신, 타인, 사물, 세상이란 풍경 위에 이런 막을 얹고, 막 너머를 희미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막을 통해 우리는 객관, 현상을 나름대로 해석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 감정이 존재함으로써 생존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뇌는 어떤 생존 정보를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을까? 감정이 있는 대상은 움직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움직임에 대한 판단 근거는 쾌 혹은 불쾌의 감정이다. 감정 렌즈로 굴절되는 빛의 신호가 생존 정보가 된다. 쾌는 안락함, 성취 등을 추구하게 만들고, 불쾌는 두려움, 불안 등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도피시킨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으로 CCTV 화면에 감정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일까? 과정은 이렇다. 외부 자극에서 들여온 빛과 어둠이 혹은 내부에서 만든 빛과 어둠이 감정 렌즈를 통해 투과된다. 투과된 빛은 본능 실장이 가진 무의식의 거울 혹은 이성 부관이 가진 의식의 거울에 반사된다. 빛은 반사되는 반면에 어둠은 바로 거울을 통과한다. 결국 반사된 빛과 통과한 어둠은 CCTV 이미지센서에 도달하며 감정 이미지를 맺게 된다. 이미지 센서에 빛의 부분과 어둠의 부분이 합쳐져 하나의 그림이 탄생되는 것이다. 여기서 빛은 쾌의 자극, 어둠은 불쾌의 자극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정의 종류는 빛과 어둠이 어느 정도로 섞였는지에 따라 결정이 된다. 빛과 어둠이 섞인 감정 이미지는 몸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가시광선은 파장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지만, 우리의 감정 이미지는 빛과 어둠의 배합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본능 실장이 시켜 무의식이 반사시킨 빛 자체, 통과시킨 어둠 자체는 이성 부관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만 우리는 의식의 거울을 활용해 외부에서 들여온 빛을 내부의 이미지센서로 반사시킬지 혹은 내부에서 탄생한 빛을 감정 렌즈를 통해 세상에 투영시킬지 선택할 수 있다. 내부에서 탄생한 빛은 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


감정은 카메라 렌즈라는 정의가 생뚱맞게 다가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도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에서 얻었다. 이제 작중 이야기 등장인물 중 하나인 해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지은은 하얀 빨래가 옥상에 널린 예쁜 풍경을 보고 사진기를 가져오지 못해 후회하는 해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으로 담아요. 그리고 마음으로 담아요. 진짜 아름다운 풍경은 사진에 담기지 않잖아요.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잠시도 놓치지 않고 찬찬히 느끼며 마음에 담아두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소중한 순간인, 지금 이 순간을 사진기 대신 마음에 담아둘 수 있다면, 마음에 카메라 기능을 하는 장치도 있음직하지 않은가? 나는 마음이란 작용을 이성 부관과 감정 렌즈의 합작품으로 생각해본다. 다시 해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해인은 여태껏 닫힌 마음으로 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의 카메라로 꾸준히 사진을 찍었지만 현상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인 재하와 연희의 소개로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로 가게 된다. 해인은 빨래가 바람에 마르는 풍경이 마치 꽃잎이 날아다니는 듯 몽환을 느끼게 된다. 해인은 노을 진 하늘을 향해 타인의 상처에서 나온 꽃잎들을 지은이 날려 보내는 모습을 보며, 지은의 눈물이 또르륵 떨어지는 모습을 사진 찍는다. 해인의 곁을 스쳐지나가듯 걸으며 지은은 카메라에 자신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에 해인은 지은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 작품이 있다며 이끈다. 사진에는 지은의 검고 긴 속눈썹 끝에 달린 눈물이 찍혀 있다. 지는 해를 풍경으로 정말 슬픈 눈동자가 찍힌 것이었다.


지은은 어렸을 적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부모님을 잃어버렸던 사고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은은 사랑하는 가족을 찾기 위해 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 세기를 넘나들도록 스스로를 봉인했다. 끊임없이 일정 나이 이상으론 늙지 않으며 수도 없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가족을 찾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채 끊임없이 좌절하며 죽지 못해 살아갔다. 사실 지은은 이미 약 50세기 전부터 살았던 존재라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해인은 사진은 자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실재만 담아낼 뿐이지 감정을 찍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은의 눈물을 본 뒤, 지은을 필름으로 인화시키고 싶었다. 결국 간절한 마음으로 해인도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실재하지 않는 대상도, 현상하겠다는 의지로 렌즈에 담아 사진을 인화한 것이었다. 나중에 해인은 지은이에게 <결정적 순간>이라는 작품에 초대한다. 전시장에서 즉석으로 관람객에 찍어주는 행위 그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해인은 지은을 자리에 앉히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라 말하며 다시 사진을 찍는다. 사진 속 지은의 눈동자에는 지은과 함께했던 존재들의 웃음이 가득 담겨 있다. 현재 지은의 옆을 지키는 존재들, 스쳐 지나간 시절 인연들, 그토록 자신이 보고 싶었던 존재들까지. 지은의 눈동자가 마치 렌즈처럼 매일 결정적 순간을, 행복과 그리움의 빛을 포착하고 담은 것이었다.


결국 지은은 사람의 마음을 옷의 얼룩에서 세탁해 말려 꽃잎으로 형상화하였듯이 해인은 사람의 마음을 인화된 사진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에 나도 힘입어 뇌를 지휘통제실로 상상하고, 감정 렌즈가 빛과 어둠을 투과시켜 만든 감정 이미지를 이성 부관이 관찰하는 모습을 형상화해본다. 나에게 마음은 이성 부관이 감정 렌즈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는 활동인 것이다.


세상과 마음에 관해 살펴보았으니, 이번엔 처음에 질문을 던졌던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 행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초등학생 땐 달리기를 1등하면 행복할 줄 알았고, 중학생 땐 내신 점수만 잘 나오면 행복할 줄 알았고, 고등학생 땐 수능 점수만 높게 나와 대학교를 잘 가면 행복할 줄 알았고, 대학생 땐 군 입대에 대한 걱정이 해결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나는 끊임없이 행복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향해 밀어붙이고 있었다. 어쩌다 행복이 나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버린걸까?


‘행복이란 무엇일까?’내가 했었던 질문을 다시 곱씹어본다. 언제서부터 나는 행복을 현재의 내 삶과 동떨어져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한 고대 철학자가 제시한 가치있는 삶을 행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행복을 쉽게 닿을 수 없는 최종 목적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거 같다. 그 고대 철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중학생부터 도덕 교과서에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쉽게 말해서 기쁘게 되는 순간의 느낌, 선물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행복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일상 속에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다.”의 격언에서의 행복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에서 유래되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eu(good-좋은)+daimon(영혼)의 합성어로, 엄밀히 말하면 행복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최고선의 삶, 가치있는 영혼의 삶, 번영과 융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번영과 융성은 자신의 행동이 이상적인 선과 조화를 이룰 때, 내면의 영혼을 잘 발휘함을 함의한다. 물론 이상적인 자아와 현재 자아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행복에 도달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작중 유명한 셀럽이지만, 촬영이 끝났을 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으로 매일 밤 울었던 은별에게 지은이 화면안의 자신과 화면 밖의 자신과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는 행복같은 일시적 기분보다 전반적인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를 실천하는 것은 최고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에 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타인과 동일한 기준과 객관적 평가 기준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남이 생각한 평가 기준에 들면, 행복이 다가온다고 착각한게 아닐까. 학생 시절 때 성적이 전부로 여겨졌던 것처럼, 군대 또는 회사에선 진급, 승진이 전부로 여겨졌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런 평가 기준이 가치 있는 영혼과 최고선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기준들이 삶의 질을 높여줄까.

 

나는 행복을 객관적 평가보다 주관적 만족감에서 포착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타인과 동일한 기준으로, 타인과 비교하며 평가내린 삶에서 행복을 포착하기 어렵다. 플라톤은《행복론》에서 재산, 외모, 명예, 체력, 언변에서 조금은“부족함을 느끼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이는 설령 자신이 타인에 비해 무언가 부족할지라도, 자신의 주관적인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에 주관적인 만족감이 항상 내재할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 행동의 기저에는 행복이 항상 고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작중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의 손님중 하나인 은별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은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자마자 모델 생활을 했고, 셀럽이 되어 어른들과 일하기 시작했다. 은별은 돈이 많아지면 가족과 함께 행복해질 줄 알았다. 은별이 번 돈으로 투룸 빌라에서 강남의 5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전보다 더 부유해진 자산에 가족들이랑 더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며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은별의 가족은 은별의 눈만 마주치면 돈이 들어가는 행위를 요구했다. 돈을 벌기 전에는 치킨 한마리로도 기뻐하며 서로 양보해가며 먹었는데 말이다. 돈의 요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어쩔 수 없이 거절하라고 해도 가족들은 은별이를 힐난했다. 결국 은별은 나중의 행복을 위해, 좀 더 많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본인을 희생해가며 찾는다. 의류, 다이어트 식품, 화장품, 전자기기 등의 공구를 시작했다. 결국엔 검증되지 않은 천연 화장품 공구에 문제가 생기면서 은별을 욕하는 계정이 생기고, 소송이 들어오게 된다. 결국 괴로움을 모두 끝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은별은 수면제통을 꺼내어 손에 쥔다.


은별이 달려왔던, 행복으로 보이는 길의 도착지는 행복이 아니었고 자신의 파멸이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다수가 믿는 행복의 허상을 좇은 것이었다. 사실 행복이 은별이 한 행동의 근원적 원인인 건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은별이지만, 현실에서 마음 하나 나눌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은별에게 온라인을 벗어난 관계는 가족뿐이었기 때문에, 돈을 벌어 월세방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가족과의 유대가 더 단단해지고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편하게 마음을 의지할 안전 기지를 찾고 싶은 생존 욕구, 돈독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이 은별의 행동 기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은별은 그저 자기 안위를 만족시킬 도구에 불과했다. 은별의 행복이 있어야할 자리에 소외감을 극복하려는 외로움, 가족들의 이기심이 있었다.


은별은 행복으로 보이는 신기루를 밑빠진 독에 채우러 계속 발버둥치고 있었다. 탄탈로스의 형벌처럼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채로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우리도 굶주림의 욕망과 목마름의 욕망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했던 탄탈로스와 유사하다. 쾌의 만족 상태는 지속적이지 못하고, 쾌의 욕구 또한 매번 충족되지는 못한다.


결국 우리의 행위 기저에 고정적인 행복이 존재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권태와 욕망을 시계추처럼 왕복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체가 생존하려는 본능의 의지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속적인 쾌를 느낄 수 있다면 변하지 않는 자극에 권태감을 느껴 우리는 굶주려 죽을 것이다. 반대로 계속 불쾌를 느낀다면 쾌의 결핍을 느끼고 생의 의지에 목말라 불안감을 느끼며 죽을 것이다. 즉, 권태와 욕망의 극단 사이에서 우리의 상태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영원한 쾌가 없듯이, 영원한 불쾌는 없다는 것이다. 작중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해가 지자마자 어둠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빛과 어둠은 양면이 아닌 한 면으로 이어져 있다. 깊은 어둠이라 해도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살아있는 한, 영원한 어둠도 빛도 없구나.” 어둠이 영원할 것 같아도 아침은 다시 온다.


모든 순간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완전한 빛과 완전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지은은 신이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시련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준다고 얘기해준다. 오늘 너무나도 암울하고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독자를 위로해준다.


지은은 행복은 내면의 빛이라고 말한다. 사실 빛이 항상 감정 렌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우리 내면에서 생성되는 빛도 있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긍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그렇다. 행복은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하늘이 아니라 마음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 우리가 지나쳤던 순간들에, 우리의 마음이 인식하지 못한 채로 곁에 있었다. 나는 행복을 아는 상태를 하나의 과정이라 상상해본다. 지은이 행복은 내면의 빛이란 것에서 발상을 시작해본다. 과정은 이렇다. 이성 부관이 상상하면서 생긴 쾌의 빛, 내면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빛을 의식 거울로 보낸다. 의식 거울이 이성 부관에게 받은 빛을 감정 렌즈로 반사시킨다. 감정 렌즈가 이 빛을 감정 이미지, 세상으로 투영시켜 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짧게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내면의 빛이 발하여 감정 이미지와 외부로 순간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행복이다.


만약, 의식 거울이 감정 렌즈로 반사시킨 내면의 빛이 겹겹이 쌓인다면, 누구보다 강렬한 빛이 된다. 이 빛이 계속 모이면 내가 원하는 나의 자아상이 된다. 빛의 집중 현상이다. 쉽게 흘러가서는 안 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순간이 지속적으로 모여 이성이 내면의 빛을 겹겹이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이성 부관은 매순간 스쳐지나가는, 빠르게 빛나는 행복의 순간을 자주 감정 렌즈로 보내고자 노력해야한다. 감정 렌즈는 이성 부관이 전달하는 행복의 순간을 잘 포착하고자 노력해야한다.


계속 빛, 행복의 순간을 강조하다보니 어둠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빛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맹인이 된다. 빛만 존재한다면, 우리의 감정 렌즈는 이미지 센서에 상을 보내지 못한다. 우린 어둠이 없다면, 인생이라는 그림을 형성하지 못한다. 완전한 빛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빛에 눈이 멀어 마치 마약에 중독되듯 계속해서 더 큰 쾌를 찾게 될 것이다. 이는 지휘통제실의 환경에 큰 변화를 초래한다. 지휘통제실의 연료중 하나인 도파민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본능 실장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생각, 숨쉬기, 음식 섭취 등은 생존과 번식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본능 실장은 지휘통제실을 구성하는 세포들과 이성에게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도록 만들기 위해 도파민이란 택배 기사를 부른다. 도파민 기사는 이성 부관에게 전서구이자 CCTV기사와 같다. 도파민은 이성 부관에게 택배를 선물해준다. 도파민이 주는 택배는 항상 긍정적인 내용물을 담고 있다. 도파민이 이성 부관에게 택배를 전달하고 난 뒤, 지휘통제실에서 나가면서 감정 렌즈가 긍정적인 경험에 더 집중되도록 초점을 조정해준다. 하지만 도파민이 오는 것으로 인한 쾌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택배물도 뜯어볼 때 가장 설레지, 뜯고 나면 나중엔 설렘과 기쁨이 금방 반감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역시 생존의 문제가 중요함에 있다. 쾌감에 오래 노출되는 것은 권태를 부르고, 권태로 인해 움직임이 줄어든다면, 생존에 요구되는 행위가 줄어들 것이다. 도파민 기사가 너무 많이 지휘통제실에 왕래한다면, 본능 실장은 생존의 문제로 인해 도파민 기사의 양을 조절하게 된다. 도파민 기사가 왕래하는 지휘통제실의 창구 수를 줄여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뇌에 갈려는 도파민은 많은데, 창구 수가 부족해 길이 막혀 이성 부관은 어쩔 줄 모르고 마비되게 된다.


이는 전에 느꼈던 쾌감을 지속하기 위해 더 많은 도파민을 갈망하는 중독 현상을 초래한다. 또한 전과 상대적으로 부족해진 도파민으로 지휘통제실은 쾌에 대한 민감도가 낮아져 감정을 잘 못 느끼게 된다. 도파민 기사가 감정 렌즈를 과하게 건드리게 되면서 오작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과다한 양의 도파민 기사는 이성 부관이 더 많은 택배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그 결과, 자신과 대상을 깊이있게 인식,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몸은 강렬한 쾌감을 찾고자 빛을 강박적으로 갈구하게 된다. 또한 정상적인 일상의 지연 보상 체계를 가진 지휘통제실의 호르몬 자극이 망가지게 되어 이성 부관은 자제력과 판단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니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다. 결국 감정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선,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암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그림이 완성되기 위해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해야한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엔 나에게 고통은 오지 않고 쾌만 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혹은 나의 마음이 없어진다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은이 상처는 마음의 나이테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해줬듯이 내가 겪었던 아픔도‘나’라는 인격을 만드는 성장통으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열쇠로도 관점을 바꿔 볼 수 있을 거 같다.


사실 지은도 나처럼 예전엔 마음이 소멸하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지은도 마음이란 작용이 없다면, 고통스러운 감정도 소멸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때론 지은은 과거에 마음이 아플 것 같은 날엔 마음을 미리 꺼내어 빈 마음으로 살다, 기쁜 날에만 마음을 다시 넣어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될 수 있다면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을 꺼내 벅벅 닦고 싶었고, 기쁜 날에만 마음을 다시 넣어 살고 싶었다고 지은은 고백한다. 그러나 이 행동들을 실행했다면 메리골드 마음세탁소에 오는 손님들의 슬픔으로 아린 마음을 공감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초를 켜는 마음으로,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에서 평안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상처인 꽃잎을 해를 향해 날려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연자 씨의 이야기로 들어가본다. 재하의 어머니인 연자 씨는 지은이 없애줄 마음의 얼룩이 있나고 물어보자, 불행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행복한 일은 천지에 널려있다고, 마음에 상처입는 순간이 많았지만 아픈 순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좋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아픔의 순간들이 있어야 지금의 나도 있고 재하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린 기쁨이란 빛과 슬픔이란 어둠을 모두 향유하면서 세상을 항해한다. 나를 사랑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느끼며 살아가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다시 오지 않는 선물이다. 스쳐지나가는 오늘이란 순간을, 연자 씨가 말한 천지에 널린 행복을 감정 렌즈로 포착해보자.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가는 행복을 감정 렌즈에 잘 포착하기 위한 조건에 관해 얘기해본다. 나는 이를 행복의 발견 조건이라 일컫는다.

 

먼저, 행복의 발견 조건 중 하나는 존재의 건강이다. 여기서 건강은 신체적 건강과 자아의 건강을 포함한다. 건강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원천이기 때문에 행복의 발견 조건 중 가장 우선시되어야할 중요한 요소이다. 건강이 없다면 그 어떤 자산도 활용할 수 없다. 건강이 약화된다면 다른 주관적, 정신적 자산도 쇠약해질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함부로 희생시켜선 안 된다. 건강이 존재에 내재해야 그 뒤에 다른 모든 것들이 있다. 지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숨 쉬기라고 말한다.


“숨 쉬기. 숨 쉬기가 제일 중요해. 숨 잘 쉬어야 살 수 있잖아?”


“숨 안 쉬면 어떻게 사니. 숨 잘 쉬어야 잘 살지. 숨 쉬고, 밥 먹고, 일하고, 낙담하고, 기뻐하고, 투닥거리고, 미워하고, 때론 사랑하고, 다시 일하고, 잠들고, 걷고, 숨 쉬고. 이게 기본이지.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기 위해서는... 숨 쉬는 게 기본이야.” 


지은은 숨을 잘 쉬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숨을 잘 쉬는 것은 신체적 그라운딩 기법 중 하나이다. 그라운딩 기법이란, 마음의 기반을 다지는 일종의 기술이다. 그라운딩 기법을 잘 활용하면, 마음의 차분함을 유지함으로써 정서적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여러 그라운딩 중 신체적 그라운딩은 자신의 신체 상태를 바꿈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기법이다. 작중 은별은 셀럽으로 유명했던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고 나서 프리랜서 MD에서 정규직 MD로 전환이 되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이후 은별은 쉬는 날엔 제일 편한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뒤 목적없이 걷는 습관이 생겼다. 그저 여유를 갖고 걷는 것만으로도 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 보이며, 마음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또, 가끔 한참 뛰고 나서 심장도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은별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낀다. 나도 은별처럼 목적없는 산책을 하면서 잡념을 비우고, 내 신체와 나를 둘러싼 자연환경으로부터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 또, 지은이 앞서 얘기해줬듯이, 숨을 잘 쉬어야겠다. 매번만큼은 아닐지라도, 가끔식 나의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며 건강한 호흡을 되찾아야겠다. 숨을 잘 쉬면 혈액도 잘 순환되고 건강해 질 것이다. 군대에서 근무할 때,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심호흡하면서 의식적으로 숨을 잘 쉬려고 노력해야겠다.


신체적 건강 얘기를 했으니, 이번엔 자아의 건강에 대해 말해본다. 건강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자아의 상태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이성 부관은 의식 거울이 타인이 아닌 자기 내면을 향하도록 노력해야한다. 타인의 눈치, 시선에 상관없이 진정한‘나’에 대한 초점을 맞춰야한다. 만일 타인의 시선에 따라 사람의 가치와 무가치가 결정된다면, 그 사람의 존재는 비참해질 것이다. 물론 사람간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간의 관계에 앞서 자기 자신이 우선되어야한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 자체를 위해 살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이든 어떤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에 비친 나라는 존재의 상은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이며 진정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계속 연연하면서 타인의 눈치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자. 


지은은 은별에게 다른 사람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을 먼저 보살피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 말고 자신을 위해 살아보기를 시작해봐. 너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어. 설령 그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일단 살아. 죽지 말고 살아. 의미와 재미 같은 거, 산 다음에 찾아. 너는 너로서 충분해. 하늘의 별 말고 네 안의 별을 봐. 어둠 속에도 너는 빛나고 있어. 기억해. 네가 무엇이건,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지금 입은 얼룩덜룩한 옷을 입어도 이미 존재만으로 별처럼 빛나고 있음을.”


지은은 타인의 별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별을 보며,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하다고 따스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안녕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나 자신의 존재와 안녕은 타인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정신적 자립으로 존재와 안녕을 만드는 것이다. 


행복의 발견 조건 중 두 번째는 지(知)와 자신의 주관적인 선택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을 알고, 본인이 직접 길을 선택함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개성이 자신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가 강조한 개성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긍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생업으로 하는 일은 본인의 개성을 유리하게 활용하고, 자신의 인격과 맞아야 한다. 본인에게 잘 맞아야 자신만의 탁월한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해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특성과 세계에 관해 관찰해야한다. 무엇이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지(知)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의 개성을 통해, 내면의 빛을 어떻게 세상으로 투영시킬지 고민해야한다.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지(知)에 이르는 출발점은 자신의 무지(無知)를 지각하는 데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몰랐던 나를 발굴해서 나만의 개성을 찾아야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보물이 있다. 자신만의 탁월성으로 주관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행복의 발견 빈도수가 높아질 것이다. 이번엔 재하의 이야기로 들어가본다.

 

재하는 어렸을 때의 외로움을 지우면서, 영화를 사랑했던 시간들을 잊게 된다. 다니던 광고 회사를 이직하려 정규직 되는 회사로 서류를 넣고 있었다. 재하는 지은에게 전공을 살리고 만다고, 사람들이 계속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른 광고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은은 이렇게 대답한다.


“전공 살리는 게 의미가 있어? 내 인생인데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야지. 하고 싶은 대로 해. 괜찮아. 뭐라고 하면 좀 어때. 내 인생인데. 갔다 아님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지. 눈치 보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정답이라 믿으면 그게 정답이야. 다른 사람들 눈치보지 말고.”


지은이 재하에게 해줬던 말이지만, 내 머리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나는 군대에서 개인정비 시간 때 전공을 어떻게 살려서 취업해야하나 틈틈이 고민하고 있었다. 지은의 조언처럼 전공, 타인의 시각에 상관없이 나의 타고난 욕망과 개성을 발굴해야겠다. 설령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진정 원했던 길이 아니였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진로를 헤매는 시간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나를 찾는 시간이었음을 지은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다. 오히려 진로를 헤매는 시간이 나를 알아가는 데이터가 쌓이는 소중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 번에 나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길로 가고 싶다는 조급함과 불안이 날 다그칠지라도,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을 통해 주도적으로 업을 선택하고 즐거움을 발휘해야겠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주관적인 선택에 단순히 직업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감정도 선택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지은의 독백 덕분이다.


매일 창밖에 해가 뜨고 지고, 때로는 비가 내리고, 때로는 비가 내리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별과 달이 뜨고, 여명이 밝아오는 것은 선택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선택할 수 있다. 내 마음은 나의 것이다. 행복은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마음 밖의 날씨는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마음 안의 날씨는 우리의 것이니까.(후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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