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크기변환]엔드월 포스터.jpg


 

대학로극장 쿼드와 즉각반응이 공동제작한 연극 <엔드 월(End Wall)-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연출 하수민, 이하 <엔드 월>)가 2025년 9월 10일에서 9월 28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연극 <엔드 월>은 한국 현대사 속 사회적 참사와 연극의 동시대성을 접목해 한극 연극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하수민 연출의 2025년 신작이다. 연극 <엔드 월>은 2021년 평택항에서 사망한 23세 청년 노동자 故 김선호 씨의 사례를 바탕으로 죽음을 관통해 삶의 감각을 그려 나간다.


 

 

2021년 4월 22일 평택항에서 23세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크기변환]엔드월 처음.jpg

 

 

연극 <엔드 월>은 이 문장에서 시작한다.


연극 <엔드 월>의 특이점은 실제 발생한 참사 및 산업재해를 배경으로 함에도, 그것의 재현 혹은 비참함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극은 애초에 아성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젊은 청년은 컨테이너를 형상화한 무대 세트 위에 걸터앉아있고, 겁에 질린 듯 혹은 누군가를 노려보듯 관객에게 시선을 건넨다. 붉은 조명이 무대를 비추며 관객은 그가 바로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임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인물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연극의 언어는 무엇이 다른가. 연극을 보는 관객이 보는 것은 살아있는 아성이 아닌 죽은 아성이며, 아성의 친구, 동료, 가족이 아닌 아성의 기억 속의 친구, 동료, 가족이다. 관객은 아성과 함께 그의 기억을 떠돌게 된다. 이 기억은 크게 세 개의 층위로 구분된다. 고등학교 친구들, 아버지를 포함한 직장 동료들(서로 다른 하청 소속일지라도), 그리고 기억의 좌표에서 만난 무명.


끝벽 옆에서 두려운 눈으로 관객을 응시하던 아성이 처음 마주한 기억은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수능 직후 설렘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소주를 마시며 춤을 추는 영상을 찍는 기억 속 친구들과 아성. 오키나와에 가고 싶던 친구들은 아성이 죽기 전까지 그 땅을 밟지 못했다. 이어서 일터에서 아성이 사망하기 1분 전의 상황이 펼쳐진다. 항만의 바쁜 기계들은 배우의 팔과 다리의 움직임만으로 무대 위에서 재현된다. 몰아치는 장면들이 기억이라는 것조차, 그리고 왜 하필 그 기억들이 떠오르는지조차 몰랐을 때 아성은 무명을 마주한다.


무명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무명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시작은 엄마의 말이다. 무명은 아성에게 엄마의 말 사이의 빈 공간이 궁금해서 기억속에 반복적으로 놓이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해준다. 아성은 자신에게도 그러한 것,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자신을 덮친 벽 너머에 무엇이 있었는지 말이다. 이어서 아성은 자신이 죽기 1분, 10분, 16분, 그리고 하루 전의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눈물이 침묵의 벽을 넘으면 웃음이 될 수 있을까



[크기변환]엔드월 바다.jpg

 

 

아성이 궁금했던 것은 자신을 덮친 끝벽 너머의 무엇이 있었는지였다. 벽 너머에 뭐가 있을지를 알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자신의 업무도 아니었던 나무 줍기를 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당연히 나무를 주운 까닭은 관리자가 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야기들-예를 들어, 왜 관리자는 권한 밖의 일을 지시할 수 있었는지, 또 자신은 왜 그 지시가 부당한지 인식했음에도 따랐는지-을 알아야 했다. 알아야 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이야기에 납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성은 침묵이 무서웠다고 말한다. 다시 몇 가지 기억들이 이어진다. 주변 사람들은 아성에게 착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성은 자신이 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단지, 침묵이 무서워서. 항만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인 고래 아저씨가 나무 줍기는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고 관리자에게 항의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나무를 주운 것이라고 회상한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알바를 해서 집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대학을 휴학하고 1년 가까이 항만에서 일하게 된 것도 모두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라고. 세상의 당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국가가 책임지라는 오래된 구호가 있다. 사회적 참사라는 적극적 정의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개인의 삶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일하다가 아프고, 병들고, 죽는 것이 개인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고. 이들은 여기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 상흔들의 책임 주체를 개인이 아닌 세계로 옮기고자 하는 의지적 문장들이다. 한편 연극 <엔드 월>은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노동자가 사망하는 세계의 이야기를 다시 개인의 차원으로 가지고 내려온다. 개인의 심연으로 깊이 파고 들기를 선택한다.


그렇지만 이미 세계의 것이 된 사건이 개인의 차원으로 서술된다고 하여서 그것의 진위가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적인 수치로만-때때로 그러지조차 못하는- 기억되는 죽음이 분명히 한 사람의 생애에 관한 일임을 더 절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연극 <엔드 월>은 말할 수 없는 자에게 목소리와 몸을 빌려줌으로써 그 과정이 가능하게 했다. 이는 분명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연극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크기변환]엔드월 커튼콜.jpg

 

 

항만은 거대한 바다 앞에 위치하지만, 역설적으로 높이 적재된 컨테이너 때문에 바닷바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연극<엔드 월>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뒷편의 바다를 가로막던 적재물들은 하늘로 올라갔다. 원래 있던 바다가 보이는 것임에도 인물들은 훨씬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이어지는 항만에서의 산업재해와 노동자의 죽음으로 쌓아올린 세계에서도,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나마 한 사람을 마주하고 바람을 마주한다. 웃음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