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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낭만을 아는 아저씨.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짧게 다듬은 수염을 기른 채 깔끔한 셔츠를 입고 와인 바 구석에 앉아 올드 팝송을 듣는 중년 남성이었다.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사실 이 표현이 누군가 내 음악 취향을 두고 한 말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는 남성도 아니고, 중년도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학생이라는 신분을 달고 있는 20대 여성이다.

 

며칠 전에도 늘 그렇듯 차 안에서 플레이리스트를 돌리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유난히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엄마와 나는 드라이브를 하며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시간을 낙으로 삼는다. 주중에 새로 발견한 노래를 공유하거나 처음 알게 된 아티스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소소한 일상이 됐다. 그러던 중 내 플레이리스트 속 바닐라 퍼지의 ‘Take Me for a Little While’과 페니 앤 더 쿼터스의 ‘You And Me’를 이어 흘러나오자, 엄마가 대뜸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너는 음악 취향이 참 낭만을 아는 아저씨 같아.”

 

한참을 웃고 넘겼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최근 들어 부쩍 지인들에게서 음악 취향과 관련한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인턴 동료 H는 제이팝과 밝은 분위기의 곡을 좋아하는데, 내 음악은 두고는 “너무 어둡고 우울해서 못 듣겠다”고 했고, 또 다른 동료 S는 외국 힙합만 즐겨 듣는 사람이었는데 내 취향을 보고 “듣는 장르의 폭이 넓어서 신기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분기별로 모이는 친구들은 내 플레이리스트를 슬쩍 훑어보고는 “마이너틱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작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취향이 어떤지. 인디 음악이나 재즈를 들으며 감상에 젖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록을 들어야 속이 뻥 뚫린다. 여유가 필요할 때면 가사 없는 영화 사운드트랙을 찾는다. 활력이 필요할 때는 케이팝이나 팝을, 아주 가끔은 힙합도 듣는다. 늘 일정하지 않고 오락가락한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정작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나의 음악 취향에 대해 곱씹어 보게 했다. 플레이리스트 속 가장 많이 들은 곡들을 추려보니 공통점은 의외로 밴드 음악이었다. 흥미로운 건 모두 밴드의 곡이었지만 최근 빠져 있던 노래들의 분위기는 제각각 달랐다는 점이다.

 

'낭만을 아는 아저씨'라는 수식어는 20대 여성인 나로서는 퍽 껄끄럽게 들리기도 했지만, 묘하게 마음에 드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낭만을 아는 아저씨의 음악 취향을 가진 20대 여자는 지금 어떤 밴드 음악을 듣고 있을까.

 


 

The Rolling Stones - Gimme Shelter



 

 

1962년 런던에서 결성되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영국의 록 밴드, 롤링 스톤스. 그 명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대중음악사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밴드 중 하나다. 추정 음반 판매량만 해도 2억 장에 이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명단의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그룹이다. 나 역시 존재만 알고 있다가 실제로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듣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접하게 된 계기도 꽤 흥미롭다. 가장 좋아하는 채널 중 하나였던 해외 영화 편집 채널 ‘The Beauty Of’에서 처음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참고로 이 유튜브 채널은 작년을 끝으로 채널 운영의 마지막을 알렸다. 시네마토그래피를 공부할 수 있는 양질의 영상들이 많아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채널이다) 그중에서도 마틴 스콜세이지의 필모그래피를 다룬 영상 ‘The Beauty of Martin Scorsese’에 삽입된 곡이 바로 ‘Gimme Shelter’였다. 실제로 이 곡은 스콜세이지의 여러 영화-<좋은 친구들>, <카지노>, <디파티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그의 영화 세계와도 깊이 맞닿아 있는 곡이다. 시원시원하면서 묵직한 분위기가 스콜세이지 영화와 묘하게 닮았다.

 

 


 

인트로를 듣는 순간 나는 이 곡과 사랑에 빠졌다. 영화 <카지노> 속 담배를 피우는 로버트 드 니로의 장면을 시작으로 <에비게이터>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비상 근무>의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존재만으로 압도하는 배우들의 아우라를 ‘Gimme Shelter’의 일렉 기타 전주와 합창 코러스가 더욱 묵직하게 끌어낸다. 지금 들어도 1969년에 발표된 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사운드다.

 

이 음악의 백미는 단연 피처링 보컬, 메리 클레이튼의 목소리다. 녹음 당시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힘을 쏟아 부른 그녀의 파워풀한 보컬이 곡의 기운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첨부된 라이브 영상은 원곡보다 긴 7분 가까이 되는 버전인데, 잊을 만하면 다시 꺼내 보는 영상이다. 여성 보컬의 화려한 애드리브와 프론트맨 믹 재거의 자유로운 몸짓이 무대 위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과연 밴드게의 악동이라 불리던 롤링 스톤스의 에너지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영상이다.

 

 

 

해서웨이(hathaw9y) - love



 


최근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인디 밴드를 꼽으라면, 단연 해서웨이라고 답할 것이다.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 2025를 주저 없이 신청한 것도, 라인업에 적힌 해서웨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밴드를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 국내 인디신이라면 한국인보다 더 잘 아는 프랑스 친구의 추천 덕분이었다.

 

해서웨이는 2020년 부산에서 결성된 인디 팝 밴드로 강키위, 최세요, 이특민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밴드의 결성 계기는 그들의 독특한 감성의 음악만큼이나 특별하다. 당시 부업으로 학교 밴드부 선생님으로 일하던 강키위가 제자였던 이특민을 영입하며 시작된, 말하자면 선생과 제자가 함께하는 혼성 보컬 밴드인 것이다.

 

이들의 데뷔 앨범인 EP ‘Boy Loves Hayley’는 수록곡들의 제목을 이어 붙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중 두 번째 트랙 ‘love’는 리드미컬한 드럼과 베이스 위에 블루스 색채의 기타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곡이다. 가사에는 사랑을 찾던 한 사람이 겪은 상처와 자책, 그리고 끝내 깨달은 사랑의 무의미함이 혼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곡을 들을 때면 어쩐지 곡 전체에서 맑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먼저 드는 것이다. 부드럽게 깔리는 강키위의 보컬이 이 혼재된 감정을 따뜻하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같은 EP에 수록된 ‘hayley’는 이특민의 역동적이고 맑은 음색이 두드러져 강키위의 보컬과는 또 다른 활기를 보여준다. ‘boy’는 두 곡보다 한결 느린 템포로 드럼과 기타, 그리고 보컬이 서서히 멜로디를 쌓아 올리며 곡을 완성하는데, 세 곡이 비슷한 듯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어 EP 전체가 앨범명처럼 작은 이야기로 느껴진다.

 

 

 

Parcels - Safeandsound


 

 


호주 출신의 일렉트로 팝 밴드 파슬스가 비교적 최근 발표한 싱글 ‘Safeandsound’는 오는 9월 12일 발매 예정인 정규 3집 LOVED에 수록될 곡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4개의 싱글 중 두 번째로 공개한 트랙으로 파슬스의 새로운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파슬스는 디스코와 펑크, 일렉트로닉 팝을 조화롭게 섞어낸 독창적인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 빈티지하면서도 결코 올드하지 않은, 세련된 방식으로 재해석한 1970년대 디스코, 펑크의 감각은 곧 그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지금 MZ세대가 가장 열광할 만한 음악을 하는 밴드라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음악은 트렌디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이 있다.


‘Safeandsound’는 기존의 밝고 경쾌한 디스코풍 곡들과는 사뭇 다르다. 도입부부터 잔잔하고 공간감이 느껴지는 사운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가벼운 드럼 리듬 위로 기타와 키보드가 은은하게 겹치며 곡을 채운다. 특히 다섯 멤버의 하모니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으로, 서로 다른 보컬 음색이 층층이 쌓이면서 곡의 제목처럼 편안하고 안정된 무드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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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VED'의 앨범 커버

 

앨범 'LOVED'와의 첫 만남은 커버 이미지 때문이었다. 원색의 옷을 입은 멤버들이 진녹색 수풀 위를 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파슬스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런 감각은 공식 라이브 영상에서도 이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비추는 카메라 아래 널브러진 악기 선들, 그 사이에 모여 앉은 다섯 멤버의 모습. 원곡과 달리 라이브에서는 보컬 하모니로 곡을 시작하며 화면이 암전된 뒤 차례로 더해지는 목소리와 연주가 곡의 서정을 더욱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이번 'LOVED'에 수록될 이미 공개된 싱글들은 모두 여름과 잘 어울리는 곡들이라 지금 계절에 꼭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Måneskin - VENT'ANNI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인디 밴드를 꼽으라면 해서웨이를 답하겠지만, 모든 아티스트 중 단 하나의 최애를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모네스킨을 말할 것이다. 모네스킨은 이탈리아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로, 2021년 유럽 최대 경연 대회인 유로비전에서 우승을 거머쥔 그룹이다. 한국에서는 아마 ‘Beggin’’을 부른 밴드로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내가 본격적으로 이들의 팬이 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2022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였다. ‘아이러니하게도’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그날이 모네스킨이 가장 큰 비판을 받았던 무대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파격적인 의상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당시 프론트맨 담아노와 베이시스트 빅토리아의 무대 의상은 전 세계 생방송에 송출되기에는 지나치게 노출이 심했다. 실제로 카메라는 이들을 거의 비추지 않았고, 유튜브에 올라온 공연 영상 역시 곧바로 삭제되었다. 라이브로 보던 나 역시 당황했지만, 동시에 모네스킨이라는 그룹을 머릿속에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곧 그만큼 화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나를 팬으로 만든 건 의상의 아니라 그날 무대에서 선보인 ‘SUPERMODEL’의 라이브와 폭발적인 에너지였다. 다른 아티스트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독보적인 에너지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호기심을 시작으로 무대를 찾아보다가 만난 곡이 ‘VENT'ANNI’였다. 제목 그대로 ‘스무 살’을 뜻하는 이 곡은 보컬 다미아노 다비드가 스무 살 무렵 자신보다 나이 많은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었던 조언을 또 다른 자아의 목소리로 풀어낸 노래다. 가사에는 불안과 불확실함,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음악적으로는 파워 발라드 장르로, 하드록이나 팝록으로 대표되는 모네스킨의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서정적인 매력을 품고 있다.

 

내가 이 곡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2분 40초쯤에 시작하는 토마스의 기타 연주 때문이다. 가사를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연주가 전하는 감정만큼은 번역이 따로 필요 없다. 더불어 나는 모네스킨의 영어 곡들보다 오히려 이탈리아어 곡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글로벌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많은 비영어권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자국어로 노래할 때 비로소 본연의 매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ZITTI E BUONI’나 ‘I WANNA BE YOUR SLAVE’처럼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주목받아 온 모네스킨에게도 이런 서정적인 면모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준 곡이자, 여전히 가장 높은 완성도를 갖춘 곡이라고 생각한다.

 

*

 

어쩌면 이번 글은 '낭만을 아는 아저씨의 플레이리스트'라는 제목을 보고 들어온 이들에게는 다소 엇나간 추천일지도 모른다. 내가 자주 듣는 밴드 음악을 중심으로 풀어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 플레이리스트를 낭만적이라 부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평범하다거나 마이너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 어떤 반응도 틀리지 않다. 취향이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고, 거기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나를 규정하는 말들이 여러 형태를 띠듯, 음악 취향 또한 다양한 얼굴을 가질 수 있다. '낭만을 아는 아저씨'라는 표현이 낯설면서도 내심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그 겹겹의 층위 속에서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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