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깨우는 시간
우리가 살아가며 순간들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때론 기억과 감정이 희미해져 스스로의 존재를 잊어버리곤 한다.
‘IMMERSION: 몰입’은 흐릿해진 자아를 다시 마주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오롯이 소리와 나만 남겨진 공간 속에서 사회적 역할이나 외부의 평가가 아닌, 순수한 감각과 기억으로 존재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음악은 그동안 의식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시간들을 끌어올려,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몰입은 그렇게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체감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시작은 새로운 음악 경험을 찾던 중, ‘클래식과 신디사이저의 결합’이라는 장르를 넘는 시도가 눈에 띄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제목인 ‘IMMERSION(몰입)’은 집중과 내면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상태를 뜻하며, 작곡가는 이를 “좋아하는 게임이나 책에 빠져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는 순간”에 비유했다고 한다. 몰입이란 외부 자극이 차단되고, 오직 자신과 예술만이 존재하는 감각의 상태다. 이번 무대는 그 심리적 현상을 청각적으로 구현하며, 청자가 음악의 흐름을 직접 느끼고 해석하도록 유도했다.
공연에는 작곡가 안성균, 피아노의 조영훈, 바이올린의 정지훈, 첼로의 최영이 함께했다. 안 작곡가는 “현시대에 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인간의 감정과 기억의 순간을 음악으로 기록했다.
프로그램
D. Shostakovich
Piano Trio No. 1 in c minor, Op. 8
Ahn Sung Kyoun (창작곡 초연)
Piano Trio No. 1 in c minor, Op. 7 _with Synthesizer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 흐르는 여덟 개의 순간]
Ⅰ. Non Allegro – 프롤로그
어딘가 도전에 대한 어둡고 두려운 시작점
Ⅱ. Pesante - 섬 집 아기
아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부재와 그리움
Ⅲ. Allegro Assai - 아리랑은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상실과 혼란
Ⅳ. Rubato ad libitum - 할머니와 여섯 살 아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이 담긴 유년의 장면을 회상
Ⅴ. Tranquillamente - 일출과 일몰은 다르다
인생의 시작과 끝, 그 다름의 쓸쓸함을 담담하게 이야기
Ⅵ. Allegro – 피아노공기놀이
피아노를 좋아했던 천진난만했던 소년의 창의와 놀이
Ⅶ. Straziantemente - 바다의 지휘자
혼란과 방황 속에서 마주한 자연과 감정의 파동
Ⅷ. Silence - 기억의 지배자
결국 지나간 모든 기억들이 어떻게 삶의 주인이 되는지
IMMERSION 몰입 _with Synthesizer
시간과 경험을 엮어 만든 음악의 서사
‘IMMERSION: 몰입’의 서사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거나 감정을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특정 시점의 감정을 불러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관객들의 기억들과 겹쳐지면서 다양한 의미를 만든다.
같은 선율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어린 시절의 여름 바다가, 또 다른 이에게는 최근의 상실이 겹쳐 보인다. 이처럼 음악은 시간과 경험에 따라 무한히 달라진다. 작곡가가 기록한 ‘한 사람의 인생’은 연주 순간마다 수없이 다시 쓰이며, 관객은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기억의 공동 저자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몰입’은 타인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행위이자, 그 기억을 내 방식대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공연은 ‘성장’이라는 서사 속에서 인간의 감정, 기억, 순간들을 음악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초반은 피아노 트리오로 시작해, 점차 신디사이저가 더해지며 사운드의 결이 확장된다. 무대 뒤로 펼쳐진 바닷물결의 미디어 아트는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고, 신디사이저 솔로는 무대에 신비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공연은 단순히 클래식 위에 신디사이저를 얹는 형식적 결합을 넘어, 음악이 청각을 매개로 기억과 감정을 어떻게 소환하는지를 실험한 무대였다. 연주를 듣는 동안 기억의 방을 하나씩 걷으며 자신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 혼란스러운 몰입의 절정에서 고요로 가라앉는 순간, 외부 자극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내면의 에너지만이 남는다. 사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했음이 느껴진다.
전통과 전자의 결합은 종종 표면적인 실험으로 끝나기 쉽지만, 이번 공연은 두 매체가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며 한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또한 안 작곡가는 곡에 대한 설명부터 자신의 커리어, 무대 조형물까지 직접 들려주었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동이 전해졌다.
이러한 시도가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더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우리 음악계의 감각과 언어를 확장해 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