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여자에겐 촉이 있다고 말한다. 매우 구시대적인 표현이지만, 이 '촉'이란 단순히 여자만이 가진 감각으로 포함하기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강화길의 소설 속 여자들은 '괜찮지 않음'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감지하고 있는, 촉이 좋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필사적으로 그 감각을 외면한다. 왜냐하면 이 감각은 반드시 어떤 구조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될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켄타우로스가 있는 미궁 앞에서 실패를 들고 있는 아리아드네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여성'으로서,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불안감과 구조적인 불평등,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자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 실마리를 따라 들어가, 결국 그 실체를 마주하고 만다.
아래 강화길의 이러한 서사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두 편의 단편을 소개하겠다.
1. 「호수-다른 사람」 - 『괜찮은 사람』
강화길의 「호수-다른 사람」은 음산한 호숫가의 물 내음이 풍기는 듯한, 분위기와 그 미스터리의 근원이 밝혀지는 과정의 긴장감이 압도적인 소설이다.
인물과 배경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기묘한 정서적 긴장감은 단순한 사건의 전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과 언어가 어긋나는 순간들에서 비롯된다. 관계와 대화 자체가 불안을 증폭시키는 구조 안에서, 공포는 구체적인 실체보다는 감지되는 분위기로 퍼져나간다.
민영과 이한이 각각 던지는 “내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의 무게는 다르다. 같은 문장을 두 인물이 반복하지만, 그 말이 지닌 의미와 절박함은 전혀 다르다.
소설 내에서 계속해 주목하는 ‘실수’에 대해 진영과 같은 여성들이 느끼는 감각과 남성들이 느끼는 감각이 완전히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성 인물들은 ‘실수’가 단순한 행동의 실책이 아니라, 불안을 감지한 몸의 반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 남성 인물들은 그 감각을 종종 불합리하거나 예민한 반응으로 치부한다.
감각의 차이는 결국 위협을 인지하는 기준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이 어긋남이 소설 내내 팽팽한 긴장을 만든다.
민영이 호수에 두고 왔다던 ‘그것’은 실체가 없다. 이한은 ‘그것’에 대해 알아내고 싶어 하나 그는 절대 ‘그것’이 뭔지 알 수 없다. 그에게 ‘그것’은 장도리 같기도 하고, 머리핀 같기도 하다.
이한은 실체를 파악하려 애쓰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사물이 아니라 여성 인물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감각적 공포의 상징에 가깝다. 그가 아무리 상상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감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미자네와 민영과 진영과 같은 여성들만은 정확히 알고 있던 공포의 실체이다. 이 공포는 말로 설명되지 않고, 몸으로 먼저 반응하며, 서로 말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어떤 감각이다.
‘그것’은 끝내 이름 붙여지지 않고, 실체화되지 않음으로써 더 강력한 공포로 남는다.
진영 또한 자신이, 그리고 민영이 그저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다. 그 믿음은 위안을 주는 동시에 현실을 흐리게 만들고, 결국 진영은 민영이 남긴 말을 통해 ‘그것’이 괜찮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순간 진영은, 감지되었지만 외면했던 공포의 실체를 직면하게 되고, 그 감각이 결코 민영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2. 「손」 - 『화이트호스』
강화길의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서사적 특성은 지방에 거주하는 여성에 대한 초점이다. 「손」은 강화길의 강점과 특징이 세 소설 중에서 유달리 뚜렷하게 드러난 소설이다.
그는 ‘도시’가 아닌 ‘지방’에서, 낯선 여성 주체가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방식과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손’은 악귀를 뜻하는 동시에, ‘손님’에서의 ‘손’이기도 하다. 시어머니는 ‘손’을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이라 하며 그가 없는 날 해콩을 삶는다 말한다.
이때 ‘손’은 단순히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질적인 존재를 '손'으로 명명하며 마치 해콩을 삶는 주술적 행위로 그것을 몰아내려 한다. 주인공 역시 이 주술적 행위에 합류하는데, 이 점이 중요하다.
소설 내에서는 다양한 관계성들이 이어진다. 아이들과 이장, 연자네, 그리고 주인공의 어머니, 딸까지 모두가 촘촘하게 엮여있다. 시골 마을에서 딸아이의 엄마이자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마을 가운데에서 모두를 중재하는 외부인인 듯하지만 그들 사이에 융화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알 수 없는 미스터리는 화자를 계속해 밖으로 이끌고, 모든 퍼즐이 맞춰질 때 주인공은 ‘손’의 정체를 마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의 위협이 아닌, 다름 아닌 주인공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롯 사이사이 끼워진 의문들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클라이막스로 나아가는 스토리 전개와 긴장감이 매우 인상적인 소설이다. 강화길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의도적으로 불확실성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정체’를 추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손’이 주인공 자신의 그림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거울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주친 것과 같은 섬뜩함을 느낀다.
3. 왜 스릴러일 수밖에 없나?
강화길의 소설은 섬뜩한 심리적 스릴러, 서스펜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단순히 이러한 스릴러로 읽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그는 매섭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아주 기민한 '촉', 우리가 무시하고 피하고자 하는 그 어떤 '괜찮지 않음'을 낱낱이 고발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그 괜찮지 않음이 가닿는 곳은 여성들에게 사회가 가하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이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촉은 결국 '여자의 감각'이 아니라 바로 생존 본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