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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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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생명이 움트는 푸르른 계절, 광주에선 수많은 삶이 피 흘리며 스러져갔다.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와 정의를 수호하던 대학생과 시민군들은 물론이고, 삶을 영위하는 데만 충실했던 소시민들조차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 당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하 5.18)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고, 역사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상흔은 아물지 않았다. 지나간 일이나 기록으로 끝난 역사가 아닌,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이 선명해지는 현재 진행형의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연극 <짬뽕>은 5.18이 짬뽕 한 그릇 때문에 일어났다는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이자 극단 ‘산’ 대표 윤정환이 집필하고 연출한 극은, 5.18을 블랙 코미디로 접근한 극이기도 하다. 극단 산의 연극 <짬뽕>은 2004년 초연 후, 21주년을 맞은 2025년까지 꾸준히 공연되며 관객을 광주의 5월로 데려가고 있다.


5.18 45주년인 2025년, 연극 <짬뽕>은 서울 여행자극장에서 5월 1일부터 6월 1일까지 공연된다. 신작로 역엔 최재섭, 허동원, 김경환이 캐스팅됐으며, 해당 역엔 배우 김원해가 스페셜 캐스팅돼 3회의 공연을 마쳤다. 오미란 역은 김화영과 박서안, 만식 역엔 이원장, 박승일, 최현규, 지나 역엔 이진경과 이나경, 순이 역엔 이세영, 박배리, 정유나, 스님 역할엔 강혁과 한승탁, 일병 역은 김기남과 이정근, 이병 역엔 황준우와 여동훈이 출연한다.


<짬뽕>의 등장인물들은 광주에서 1980년 5월을 살아가는 평범하고 결함 많은 소시민이다. 먹고살기 바빠 정치가 뭔지, 이념이 뭔지 알 턱이 없는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밝은 내일을 꿈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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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곳이란 뜻의 중국집 ‘춘래원(春來園)’ 사장 신작로는 10년 고생 끝에 장만한 가게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한쪽 다리를 절어도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여동생 지나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작로는 배달부 만식과도 친형제처럼 지낸다. 만식은 고아 출신이지만, 할 말 다 하는 불같은 성격이다. 또한 작로는 다방에서 커피 배달을 하는 여자 친구 미란에게도 금반지를 끼워주며 프로포즈를 했다. 행복한 미래를 앞둔 작로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뿐이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영업이 끝난 춘래원에 배달 전화가 온다. 짜장면과 짬뽕, 무려 탕수육까지 포함된 주문에 작로는 투덜대는 만식에게 철가방을 들려 보낸다. 만식은 보초를 서던 군인 두 명과 마주치고, 배고픈 군인들은 ‘국가의 명령’이란 핑계를 대며 짬뽕 탈취를 시도한다. 만식은 총까지 겨누며 행패 부리는 군인들의 머리를 철가방으로 치고 달아난다.


그날 밤, 뉴스에선 5월 18일 0시를 기준으로 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즉 내란 소식이 전해진다. 폭도가 군인들을 공격하고, 무기로 철가방을 사용했단 소식에 만식은 사색이 된다. 춘래원 식구들은 무슨 코미디냐며 채널을 돌리라 하지만, 모든 채널에선 똑같은 뉴스가 나올 뿐이다. 자신이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여 일이 커졌다고 착각하는 만식은 경찰에 자수하겠다 한다. 불길한 직감이 드는 작로는 만식을 뜯어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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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로는 춘래원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만식이 세상을 떠나는 악몽을 꾸고, 불안에 사로잡힌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충돌하는 광주 시내는 매캐한 연기와 비명으로 뒤덮인다. 착하고 살가운 미란은 학생들에게 주겠다며 커피 배달에 나서 작로는 더 미칠 노릇이다. 그러던 중 만식과 실랑이를 벌였던 군인들이 춘래원에 찾아와 음식을 시키고, 만식은 그들을 알아본다. 작로와 만식은 그들을 제압하고 총을 빼앗는다.


군인들은 계엄군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방위였다. 그들은 짬뽕을 탈취하려 했던 자신들의 일탈을 뉘우친다. 군인들은 방위복 위에 지나가 준 여자 옷을 입고 춘래원을 황급히 빠져나간다. 해프닝은 끝났지만, 춘래원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학생들과 시민군을 챙기러 전남도청에 가던 미란이 세상을 떠났단 소식이다.


극은 후반까지는 계엄군 같던 군인들을 다른 지역의 방위로 처리하고, 작로가 고문받는 장면을 꿈으로 넘기며 교묘하게 비극을 피한다. 정신 연령이 어린, 동네 미친 소녀 순이를 코믹 캐릭터로 처리하면서도 순이의 사연을 들려줘 비극과 희극의 경계를 넘나든다. (순이의 부모님은 대학교수였으나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순이는 할머니와 둘이 살며, 그날 이후 성장이 멈췄다.)


군인들이 계엄군이 아닌 방위였고, ‘빨간’ 멜빵 바지를 입은 순이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피해 간 건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위장해 관객의 주의를 끄는 트릭. 영화 용어로, 히치콕 감독으로부터 유래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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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후반에 몰아친다. 정치·이념이 뭔지 모르는 만식은 미란의 사망 소식에 방위들이 남긴 총을 들고 춘래원을 뛰쳐나간다. 그와 마음을 주고받았던 지나도 만식을 쫓아 나선다. 겁 많고 이기적이며 지독하게 현실적이지만, 작로는 그들이 사지로 향하는 걸 방관하고 있을 순 없다. 작로 또한 총을 들고 거리로 달려 나간다. 텅 빈 춘래원엔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5.18 당시 계엄군은 애국가를 향해 기립한 금남로의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했다.


춘래원 식구들은 선의를 베풀다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다 순식간에 비극에 휘말렸다. 이들의 행동은 짝사랑하는 마리우스를 지키기 위해 바리케이드에 합류했던 <레미제라블>의 에포닌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사상과 이념은 그저 ‘사랑’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나라는 그들에게 폭도, 간첩, 빨갱이란 프레임을 씌우고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미란의 사망 소식에 작로가 ‘레지면 레지답게 다방이나 지키지, 자기가 뭔 독립 투사냐’며 된소리 섞인 욕을 퍼붓는 장면, 시위하던 여학생이 계엄군에게 성희롱을 당해 춘래원에 숨는 걸 코믹하게 소비한 건 아쉽다. 1980년 배경, 21년 전에 초연된 극이어도 변화하는 시대 인식과 성인지 감수성에 맞춰 캐릭터와 장면을 더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관객은 2025년을 살고 있기에, 동시대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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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두 명을 무대에 올려 짜장면과 짬뽕을 주는 이벤트로 시작한 극은, 5월엔 도시 전체가 제사인 광주의 생생한 슬픔을 객석으로 데려와 여운을 남긴다. 사장과 직원 사이였지만 친형제만큼 각별했던 작로와 만식은 엔딩에서도 투닥거린다. 작로는 평소 만식에게 빈 컵의 내용물을 그의 머리에 뿌리며 ‘없다’라고 장난치는 걸 즐겼다. 작로는 여전히 만식에게 빈 컵 안 내용물을 붓는 시늉을 하며 ‘없다’라고 한다. 그건 홀로 남은 작로가 무덤가에서 빈 술잔을 붓는 행위이기에, 작로의 장난을 받아줄 이도 이젠 아무도 ‘없다’.


광주(光州)는 ‘빛(光)’의 도시이다. 일제강점기에도, 1980년 5월에도 시대의 어둠을 불꽃으로 태워 빛으로 탄생시킨 빛고을 광주는 역사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땅이었다. 민주주의의 성지, 대한민국의 뜨거운 심장, 민족정신의 방어선인 광주. 빛 광(光) 자는 사람(儿)의 머리 위에 불(火)이 빛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광주의 사람들은 그 자체가 불이고, 이웃과 역사의 어둠을 빛으로 밝힐 운명을 타고났다. 평범하지만 용감한, 사랑하는 이들만큼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연극 <짬뽕>의 등장인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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