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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문을 나섰을 때 나를 마주한 건 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텁텁하고 눅눅한 공기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였던 터라, 이렇게나 공기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동네 과일 가게를 지나가는데, 익숙하면서도 한 계절에만 맡을 수 있는 모기향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모기향이 벌써 나다니, 모기향을 맡았으니 이제 여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프루스트의 마들렌 현상처럼, 내 머릿속에는 몇 해 간 쌓인 여름의 추억과 이미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냄새가 주는 힘이 이렇게나 강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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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일 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초등학생 때는 계절마다 큰 이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봄 소풍, 여름방학, 가을 운동회, 겨울 스키캠프 등등… 각각의 이벤트에는 계절의 이름이 붙어 있었고, 매일매일 새로운 날들로 이루어진 일 년은 다채롭고 입체적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내 삶에서 이벤트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계절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현실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공기의 미묘한 흐름과 그 계절의 냄새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겨울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며 겨울 스웨터를 곱게 접어두고,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반팔티를 꺼냈다.

이렇게 맞이한 여름도 빠르게 흘러가고, 또 다른 계절의 냄새를 맡게 되는 시간이 오겠지.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하루였다.

 

어느 계절을 겪던 그 계절의 시간을 걷는 순간에는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에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수박을 먹는, 무언가 쨍쨍한 필터를 한겹 씌운 듯한 여름이 그리워진다. 땀이 뚝뚝 떨어질 만큼 더워서 10m도 못 걷겠다고 선언하는 여름에는 캐럴이 들리는 거리를 걸어 다니며 붕어빵을 먹는 겨울이 그리워진다. 막상 그토록 갈망하던 계절이 오면 또 후회하고 다른 계절이 오기를 그렇게 기다릴 거면서.

 

아직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인 요즘, 모기향을 맡으니 좋았던 여름의 기억만 떠오르는 걸 보면 올해의 나도 참 여전하구나 싶다. ‘여름이었다’라는 밈이 유행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로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건 아닐까.

 

올해 여름은 어릴 적 느꼈던 여름처럼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많이 사랑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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