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때 읽었던 <돼지책>의 내용은 여전히 생생하다.
앤서니 브라운의 독특한 상상력과 감각적인 스토리텔링은 그 시절에도 각별했다. 그의 섬세한 손길에서 비롯된 그림은 그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향한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어린 날에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꿈의 세계를 그려주었던 그림이 어른이 된 오늘에는 따뜻한 향수와 삶에 대한 고찰을 선사한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앤서니 브라운의 원더랜드뮤지엄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은 아이부터 아이였던 어른까지 폭넓게 즐길 수 있는 전시다. 해당 전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0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250여점의 원화를 선보인다.
전시는 오는 9월까지 이어진다.
앤서니 브라운식 유머 : 초현실주의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을 연상케 하는 작업 방식이 두드러진다.
데페이즈망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으로 익숙한 사물을 비일상적인 맥락에 배치해 낯설게 보이도록 한다. 실제로 그는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좋아하며, 작업 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책(Piggybook), 1986)>을 비롯해 그의 여러 작품에는 맥락과 동떨어진 동물이나 사물이 불쑥 등장하곤 한다. 단순한 유희를 넘어 이러한 배치는 서사를 예견하거나 인물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이스터에그(Easter Egg)로 작동하기도 한다.
▲Willy the Dreamer 1997 ⓒAnthony Browne
<이제부터 변할 거란다(Changes, 1990)>에서는 여동생의 탄생을 앞둔 조셉의 불안과 두려움을 사물의 변형을 통해 시각화했다.
주전자가 고양이로 바뀌거나 소파가 고릴라와 악어로 변하는 장면은 조셉이 겪는 감정의 격동을 표현한 앤서니 브라운식의 재치(Wit)이자, 유머(Humor)다.
부정적인 감정에 주목하다
브라운의 그림책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가 감정의 복잡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인간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에 주목한다.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어떡하지(What if…?, 2013)>는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조가 친구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리며, 엄마와 함께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동화 전반의 내용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역설적으로 이야기 내내 조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엄마 또한 이러한 감정을 품고 있다.
앤서니 브라운은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의 대상이기보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려낸다. 이는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그만의 공감이다.
가족을 상상하다
가족은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나 브라운의 가족 이야기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상상을 더해 재구성된다.
[“아이디어는 어디서든 떠오릅니다. 제 이야기 중 일부는 어린 시절 겪은 일에서 비롯되지만, 그 경험들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저는 셰이프게임을 하듯, 이야기를 변형시킵니다.”] - 앤서니 브라운
그의 가족 시리즈는 행복한 작업 과정임과 동시에 고민이 많은 영역이었다. <우리 아빠(My Dad>, 2000)>, <우리 형(My Brother), 2007>은 실제로 앤서니 브라운의 아버지와 형이 모티브가 되어 상당 부분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우리 엄마(My Mum, 2005)>에서는 유머러스한 아버지와 달리 차분하고 위엄 있는 어머니를 동화로 녹여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힘 있고 단단한 인물로 어머니를 그려낸다.
실제 모습과는 다를지라도 그 감동은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오히려 그대로 구현하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상상의 힘이다.
▲My Mum 2005 ⓒAnthony Browne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앤서니 브라운은 무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익숙함에서 낯섦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는 초현실주의의 작품처럼 말이다.
그림책 페이지를 넘기듯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 숨겨진 상징들과 시각적 유머, 브라운식의 오마주들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실제로 이번 전시는 대형 미디어아트, 놀이형 설치작품까지 어우러져, 그림과 공간이 하나가 되는 몰입형 전시를 경험하게 한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제안한 셰이프 게임을 즐겨볼 수 있다.
[“그림책은 나이가 먹었다고 접어야 할 책이 아니라, 나이를 불문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 앤서니 브라운
▲ⓒKei Liao, Artcenter IDA
우리는 종종 그림책을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전시는 그림책이 단순한 어린이용 도서가 아니라, 감정과 상상을 담는 그릇이며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 장르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어린이들은 상상의 세계를 한껏 누릴 수 있고, 어른들은 익숙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감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파민 터지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일상의 작은 것 안에서 셰이프게임을 즐겨보면 어떨까.
익숙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성실히 발견해 온 앤서니 브라운 전시가 삶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꿔줄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