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앤서니 브라운 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전시가 열린다.
앤서니 브라운은 한국의 아동 독자들에게 『돼지책』, 『숲 속으로』, 『미술관에 간 윌리』, 『고릴라』 등으로 유명한 동화 작가로서, 200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을 수여받으며 최고의 아동 문학 작가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이 전시에서는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는 신작까지 앤서니 브라운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며, 그림 속에 남겨진 짧은 메모까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존의 동화로 출간되어 유명한 작품 외에도 <나의 프리다>, 한국인 친구의 죽은 강아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숨바꼭질> 등 비교적 최신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도 있고, 앤서니 브라운의 기존 작업에서 착안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상이나 ‘킹콩’의 시네마 버전처럼 대형 미디어 아트와 결합하여 본 전시를 더욱 새롭게 경험할 수 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
Willy's Stories, 2014, Anthony Browne
앤서니 브라운은 훌륭한 화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림을 엮어 하나의 완성된 서사로 풀어 내거나, 하나의 그림 속에서 여러 맥락이나 이야기를 담는 작가이기도 하다. 여러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은 서로를 보충하기도 하고, 여백의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숨겨진 것들은 작품의 주요 메시지 외에 다른 맥락을 배치하고 그림의 이면을 암시하기도 한다.
『미술관에 간 윌리』처럼 각 그림의 집합으로 구성된 그림책의 경우, 그림의 주요 대상을 ‘바나나’, ‘고릴라’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활용하며 그림책의 여러 작품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성장기에 있는 어린 침팬지 윌리willy의 인간 거울쌍인 빌리billy(문자로 쓰여진 willy를 발음하면 빌리billy로 발음되는 독일어 같은 유럽권의 언어가 있기에 둘의 언어적 유사성은 캐릭터의 유사성을 함의한다)라는 아이 캐릭터를 바탕으로 한 동화들이 시리즈로 등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Big Gorilla A Book of Opposites, 2024, Anthony Browne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들 중 공통적인 요소 중 하나는 그가 고릴라를 포함한 유인원을 기존의 문학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에 놓아 주된 캐릭터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딸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대신 고릴라가 아버지 역할을 해 주고 추억을 쌓는 『고릴라』나, 『겁쟁이 윌리』부터 시작된 어린 침팬지 ‘윌리’의 흥미진진한 모험담과 경험을 다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고릴라를 그리는 것이 ‘환상적’이라고 표현했던 앤서니 브라운의 미적 취향 속에서 동물성을 함의하는 고릴라와 유인원이라는 모티프는 기존의 근대성이 함의하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관을 실험하거나 비-인간으로 공동체의 범위를 확장하는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
주체와 객체의 전도라는 아이러니를 구체화하는 기법 역시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동물원』 속에서 마치 동물원에 온 관람객들이 동물의 우리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기법은 동물성을 경유하여 현재 근대화된 인간의 삶에 의문을 던지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또한 『거울 속으로』에서 나타나는 사람이 동물(강아지)을 산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등장하는 그림이나, 가사 노동을 전혀 부담하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이 돼지로 변하는 ‘변신’ 모티프가 반영된 『돼지책』 역시 흥미로운 철학적 사유를 미적으로 구체화하며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반영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불안한 가족의 이미지나 가족 간의 관계가 균열하는 양상은 역시 흥미로운데, 『고릴라』, 『동물원』 속 무관심한 아버지와 『헨젤과 그레텔』 속 어머니의 이미지가 함의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긴장, 『숲 속에서』 초반에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와 무덤덤한 어머니처럼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부부 간의 대립을 암시하는 화소, 『터널』 등에서 나타나는 형제자매 간의 미묘한 긴장과 유대의 공존 등 구체적으로 사건화되지 않더라도 미묘한 감정의 코드들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 아빠』, 『우리 엄마』 등 무한한 부모의 사랑을 강조하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의 작품들이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만을 절대화하는 규범적인 결론으로 회귀한다고 보기 어렵고, 가족 개념이 균열하는 구체적인 현실태를 묘사함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열어 놓는다. 이러한 가족의 불안정성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여 상상과 꿈의 세계, 거울의 활용 등의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사조와 초현실주의 사조에 영향을 준 정신분석학의 유산이 반영되었으며 실제로 『꿈꾸는 윌리』에서는 탐험가가 된 윌리와 함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묘사되기도 한다.
패러디의 방법론과 낯설게 하기
Willy the Dreamer, 1997, Anthony Browne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경향 중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동화 및 신화의 패러디가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시리즈가 그의 삽화로 재탄생하기도 하며, <헨젤과 그레텔> 등 동화의 그림을 새롭게 그리기도 한다.
기존 동화의 이야기나 요소, 그리고 서사구조를 활용하여, 동명의 동화를 패러디하여 더욱 낙관적이고 희망적으로 끝 맺은 『세 가지 소원』, 남매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인 『터널』과 빨간망토 이야기를 차용한 『숲 속으로』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숲 속으로』에서는 주인공 소년이 숲 속에서 <잭과 콩나무> 속 잭과 헨젤과 그레텔, <곰 세마리와 골디락스> 속 소녀 골디락스 등 기존의 전래동화(fairy tale) 속 등장인물들을 만나기도 하고, 『터널』 속 돌로 변해버린 오빠를 되돌리는 여동생의 이야기는 동서양의 신화나 민담 모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화소다.
또한 ‘미술관’을 주요 공간으로 한 작품들 중에서는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연속>,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 <이미지의 배반>을 포함한 수많은 작품들처럼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들을 패러디해 독립된 그림으로 만들거나 화가의 특정 요소를 차용해 새롭게 콜라주처럼 그려내기도 한다. 이는 어찌 보면 자신에게 영향을 준 기존의 화가들에 대한 헌사라고도 볼 수 있다. <터키탕>, <모나리자> 등 명화를 패러디한 작품 역시 주목할 만하다. 기존의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익숙하고 친밀한’ 작품을 패러디하여 ‘낯설게’ 보도록 하는 그의 기법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함은 물론,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문학의 기법을 유연하게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불안과 미완이라는 아이의 경험
A Boy, His Dog and the Sea, 2023, Anthony Browne
앤서니 브라운의 작업에서는 아이들이 겪을 법한 다양한 정서가 묘사되지만, 전형적인 동화가 그러하듯 규범성으로 회귀하는 교조적인 교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 침팬지 소년 윌리와 인간 소년 빌리의 시작이다. ‘겁쟁이 윌리’와 ‘겁쟁이 빌리’였다는 것은 사회의 상식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이를 폭력적으로 경험하는 아이들의 불안한 내면을 반영한다. 그의 이야기에서는 불안이라는 기제 속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성장을 꿈꾸는 아이들이 묘사되지만, 아이를 어른의 미달태로 규정하는 규범적이고 도식적인 성장 서사 대신 아이들이 상상하는 다양한 대안적인 삶의 가능성 속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환상적인 세계의 파편적인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 내재하는 불안의 정서를 창조적인 것으로 전유하는 그의 방법이, 일상에서 비롯되는 ‘불안’이 항상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안다.
마치 상실의 공포를 미리 학습하여 불안을 경감시키는 정신분석학의 ‘포르-다’(fort-da) 놀이처럼, 상처 없는 장밋빛 미래는 확증할 수 없지만 그러한 상처를 받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이 삶의 지속에 있어서 필요조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