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 독립운동가를 개인적으로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역사책에 단 몇 줄로 남은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 아닌, 기억과 마음에 영원히 새겨질 유일한 한 사람이 된다면. 목숨을 잃거나, 살아도 죽는 게 낫겠다 싶을 고문을 받을 게 뻔한 상황이라면 위대한 행보를 순수하게 응원만 할 수 있을까.
영화 <암살> 주인공인 여성 독립운동가 안옥윤에겐 어릴 때 헤어진 일란성 쌍둥이 언니 미츠코가 있다. 옥윤과 전혀 다른 삶을 산 철없는 미츠코는 자신과 같은 얼굴의 동생을 바로 알아보고 기뻐한다. 미츠코는 옥윤에게 ‘나도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좋아해. 그런데 넌 안 했으면 좋겠어.’라며 가감 없는 속내를 드러낸다. 독립운동가를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진짜, ‘내’ 동생인 ‘넌’ 그 위험한 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진심일 것이다.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1940년을 사는 독립운동가와 1980년을 사는 대학생이 책이란 매개체로 시간을 뛰어넘어 소통하고 성장하는 작품이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의 1980년을 사는 대학생 해준과 <암살>의 미츠코를 동일 선상에 놓은 건 절대 아니다. 해준은 시대와 진실을 외면하고 편하게 살아온 부류와는 완전히 정반대기 때문이다.
해준은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히려 너무 잘 알고, 그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에 현실이 무서운 엘리트 대학생이다. 부모님이 정해준 대학과 전공을 따라 명문대에 입학한 도련님 해준은, 방송반에서 한 선배를 만난다. 독재정권에 저항해 자유 민주주의와 정의를 부르짖는 그녀는 해준의 정신적 지주이자 동경, 끌림의 대상이 된다.
아직도 유약한 소년 같은 자신과 달리, 어른처럼 단단한 선배에게 해준은 감히 좋아한단 말 같은 건 꺼낼 수 없다. 선배를 쫓아 학생 운동 현장을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올곧았던 탓일까. 선배는 해준이 보는 앞에서 폐허 속으로 영원히 떠나버린다.
선배를 잃은 후 학생 운동에 회의감을 갖고 방황하는 해준은 어느 날 학교 근처 오래된 옛 서점에 숨어든다. 책장에서 누군가가 ‘폐허’에 대해 쓴 미완의 소설을 발견한 해준은 뒷이야기를 이어 쓴다. 그 소설은 1940년, 만주로 떠난 아버지가 남긴 ‘아시타 서림’을 운영하는 독립운동가 양희가 작자 미상 형태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소설을 함께 쓰던 둘은 개인적인 대화를 하며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름조차 모르는 상대방과 자신 사이엔 40년이 흐르고 있단 건 상상 못 한 그들은 만남을 약속한다.
창작 초연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2025년 4월 8일 서울 혜화 et theatre 1(구 눈빛극장)에서 개막했으며, 6월 21일에 막을 내린다. 1940년 독립운동가 양희 역엔 이봄소리, 이지수, 박새힘이 캐스팅됐다. 1980년 대학생 해준은 정욱진, 윤은오, 임규형이 연기한다. 배우들은 양희·해준과 동시에 1인 2역(1980년 해준의 선배/1940년 양희의 독립운동 동지)을 맡아 더욱 풍성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영화 <동감>, 드라마 <시그널> 및 수많은 타임워프 작품을 연상시킨다. 무전기로 현재와 과거의 사람이 소통하는 위 작품들과 달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의 소통 매개체는 책이다. 문학과 낭만을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 및 여자가 글을 대놓고 쓰기 힘든 시대라 숨어서 쓰는 건 뮤지컬 <브론테>, <레드북>을 비롯한 글 쓰는 여성들을 내세운 작품들이 생각난다. 오프닝과 엔딩이 같은 듯 다른 수미상관 구조 및 극의 전반부에선 개인적인 감정들, 후반부는 사회적인 주제까지 화두를 확장한단 점에선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도 떠오른다.
즉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콘텐츠 시장에서 확실하게 검증된 익숙한 소재와 이야기들, 듣기 편하고 서정적인 넘버들까지 잘 조합해, 창작 초연임에도 안정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바꿔 말하면, 대다수의 한국인 관객에겐 배경지식을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누구나 쉽게 몰입할 수 있단 뜻이기도 하다. 소위 있어 보이지만 어렵고 이해 못 할 작품보단, 이해하기 쉽지만 메시지는 깊고 묵직한 작품이 대중·상업 예술 시장에선 더 많은 선택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출발부터가 현명한 작품이다.
극 전반부는 로맨스 장르의 구성을 충실히 따른다. 상처 입고 숨어버린 동물 같은 남자 주인공·그 동물의 마음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소통하는 수의사 겸 조련사 같은 여자 주인공의 조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로맨스 장르에 공식처럼 적용됐다. 해준과 양희도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로맨스 주인공들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어도 일단 속내를 감춘다. 그러면서도 저 사람은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단 확신이 들 때, 그들은 삐뚤어지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려 한다. 40년의 시차는 모른 채, 서로가 만남 약속을 어겼다고만 생각하는 해준과 양희의 유치한 말싸움이 그걸 정확히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있을 법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럼 조선에 사는 사람이 조선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지. 도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해야 한답니까.
조선에 산다고요? 그럼 저는 고조선에 삽니다.
‘사과를 하십시오’ 넘버 가사 중 일부
양희는 서점을 운영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소설도 직접 쓸 정도로 감성과 지성을 갖췄다. 해준 또한 명문대 재학생이며 40년 전을 사는 양희와 막힘없이 필담을 나눌 정도로 지적 수준이 뛰어나다. 그런 그들이 이성인 상대방을 의식하며,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 후엔 관객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유치해진다. 사실 로맨스란 원래 그런 것이다. 지성, 사회적 위치, 체면, 자존심 같은 건 다 내던지고 오직 감정과 마음만을 주고받는 것.
전반부가 로맨틱 코미디라면, 후반부는 휴먼 드라마와 멜로다. 양희가 참여할 거사의 결말까지 아는 해준은 비극을 막으려 몸부림친다. 양희는 미래를 짐작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한다. 전반부엔 로맨스 장르 여자 주인공으로서 공감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후반부의 양희는 영웅적인 독립운동가로 변모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 공중에서 나타난 신이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꼿꼿하고 담대한 그녀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실제로 양희처럼 행동했다. 그들이 목숨 바쳐 일궈낸 현실이란 땅 위에, 오늘날 우리가 비현실적으로 안온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알아버린 이상,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아는 사람, 잃고 싶지 않은 사람, 지키고 싶은 사람이 된다. <암살>의 미츠코처럼 해맑게 살았어도,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해준처럼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견디며 살았어도 사지로 향하는 그들을 일단은 말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독립운동가이기 전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미 한 번 선배를 떠나보내며 상실의 고통을 겪은 해준은 또다시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나’를 버리고 ‘나라’를 선택했다.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선배를 가슴에 묻은 해준이 멀지 않은 과거이자 역사, 또 다른 ‘선배’인 양희를 기억하는 것처럼 2025년을 사는 우리도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1940년과 1980년. 또 무수한 시간을 버텨 폐허를 비옥한 땅으로 일궈내, 우리에게 내일을 선물한 선배들의 시간을 이어받아 살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