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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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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이 영화를 봤다. 범상치 않은 포스터가 암시하는 것들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늘 미뤄 두었던 작품. 어느 날 느닷없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고, 이 영화가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마츠코의 일생을 여러 번 곱씹다가 이 영화에 어떤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졌다. 그만큼 여운이 긴 영화다. 사람들은 마츠코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그동안 많은 리뷰들을 찾아 보았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사람, 순진하고 미련한 사람, 남자들로 인해 인생 망한 여자...

 

마츠코라는 인물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을 살피며 든 의문은 그녀의 삶이 '남자의 사랑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인생 망친 여자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을까, 였다. 마츠코의 일생에는 과연 그렇게 요약될 수 없는 요소들이 더 많다. 그녀의 삶에 대한 '평가'에 집중해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그 밖의 부분들을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봐도 그저 시시한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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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는 쇼에게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온다. 행방불명되었던 고모 마츠코가 사체로 발견되었으니 그녀가 살던 아파트에 방문해 유품을 정리하라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마츠코의 삶에 대해 "어떻게 봐도 그저 시시한 인생이었다"고 말한다.


중학교 교사였던 마츠코는 자신의 반 남학생 류가 일으킨 절도 사건에 대해 그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범인이라고 거짓말하고 해고된다. 집에서는 아픈 여동생 쿠미를 보살피느라 자신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괴로워하다가 가출한다. 그녀는 폭력적인 작가 야메가와와 동거하고, 그가 자살한 후에 그를 라이벌로 여겼던 오카노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자신을 배신한 오노데라를 살해한 후에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찾아간 곳에서 만난 이발사 시마즈와 동거하고, 살인죄로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엔 제자 류와 재회해 동거한다. 야쿠자로 활동하던 류가 교도소에 가자 마츠코는 그가 출소할 때까지 기다리지만 류는 마츠코를 보자마자 주먹을 휘두르고 도망간다.

 

마츠코의 불행은 사람에 대한 철저한 믿음에 기인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믿은 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거듭해서 믿은 죄. 자꾸만 배신당해도 불신하지 않은 죄. 인간에 대한 빈틈없는 신뢰가 그녀를 비참하게 만드는 요소다. 계속해서 거절당하고 버림받지만, 마츠코는 지난 사랑과 인연을 후회하는 일에 시간을 쓰거나 마음을 재고 따지기보단 자신이 상처받더라도 계속 사랑하는 일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그녀는 '실속'을 추구하는 것이 곧 현명한 일로 여겨지는 세상의 필터로 볼 때 시시한 사람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선 단단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세상의 타락에 끝내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늘 버림받고, 상처받고, 밀려난다.


이 작품 속에서 정작 혐오스러운 건 마츠코의 사랑을 이용한 남자들이다. 영화의 제목을 다시 읽어 본다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등장한 남자들)"쯤으로 읽을 수 있겠다. 자기 연민에 빠져 폭력과 착취를 일삼는 작가 야메가와, 야메가와에 대한 사사로운 라이벌 의식과 열등감으로 인해 마츠코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정복감을 느끼려 했던 오카노 등 그들이 마츠코를 대했던 방식이 인간적이지 못하다.


마츠코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녀의 선택들을 평가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입장에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왜 미련한 사랑을 반복해서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닌, '왜 끊임없이 거절당하고 버림받더라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을 바꾸어 봐야 한다.

 

 


"네 고모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멋진 여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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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의 교도소 동료 메구미는 쇼 앞에서 그녀를 회상하며 "네 고모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멋진 여자였어"라고 말한다. 메구미는 마츠코를 세상의 필터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인물이다. 그녀가 아는 마츠코는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변명이나 후회가 없는 여자다.

 

메구미는 마츠코가 류와 동거하던 시기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마츠코의 시퍼렇게 멍든 눈을 보고 류의 짓이냐며 화를 내지만,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더 큰 목소리로 "저 사람과 함께라면 지옥이든 어디든 갈 거야. 그게 내 행복이야."라고 외치던 마츠코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서 메구미는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메구미는 마츠코를 응원하고 사랑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위로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츠코를 망치는 동시에 살게 하는 대상이 어쩔 수 없이 류라는 사실을 안다. 외톨이가 되는 것보다 맞아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여자, 자신이 훼손되더라도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 마츠코의 거대한 결핍과 욕망을 온전하게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메구미는 마츠코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함부로 그녀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다. 메구미가 보기에 마츠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행복해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힘껏 삶으로 뛰어드는 사람이다. 그 모습이 마츠코를 너덜너덜하게 만들더라도 결국 그녀를 아름답게 한다고 메구미는 생각한다.

 

메구미는 마츠코를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다만 마츠코가 자발적인 의지로 변할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을 찾아올 수 있게끔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는 친구다. 마츠코가 은둔자가 되어 집과 병원만 오가는 생활을 반복할 때, 메구미는 우연히 병원에서 마츠코를 만난다. 너무나 달라진 마츠코의 모습에도 메구미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신과 함께 일하자며 명함을 건넨다. 마츠코가 새롭게 희망을 품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 건 바로 메구미가 건넨 명함이다.

 

마츠코가 메구미에게 무사히 연락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여태 자신이 알던 사랑과 행복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보다 환하고 안정적인 형태의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고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이 가능하다는 진실을 알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츠코는 나에게 하느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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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만난 성직자에게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류는 마츠코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마츠코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마츠코를 만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최선이라고 믿는다. 류는 마츠코가 자신에게 베푼 헌신적인 사랑이 무서워 그녀를 잊기로 결심하고, 출소하던 날 교도소 앞에서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마츠코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도망간다.

 

류는 마츠코가 죽은 후 그녀의 조카 쇼를 만나 "마츠코는 나에게 하느님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법을 몰랐던 인물이다.

 

류는 자신의 출소만을 기다린 마츠코에게 주먹을 휘두름으로써 다시 한 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마츠코를 위한다면, 류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은 마츠코가 자꾸만 그를 용서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야쿠자로서 그가 저지르고 다니는 일들을 뒤에서 수습하며 마음 졸이지 않도록, 불안에 떨지 않도록, 용서받을 일을 만들지 않고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류는 결국 마츠코를 위한 결정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놈"이라는 한계 속에 가둔 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마츠코를 자신의 바깥으로 내던진다. 그것이 마츠코를 위한 최선이라고 합리화하지만, 결국 자신의 어떤 면도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지키는 방식인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변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류는 마츠코의 죽음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르며 또 다시 후회한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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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의 사체가 발견된 후 쇼가 그녀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벽에 가득 적혀 있던 글자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이는 거듭된 사랑의 실패와 좌절 끝에 자신을 방치한 마츠코의 자기혐오로 읽히기도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혐오로도 읽힌다. 교사에서 성 노동자, 범죄자가 되었던 마츠코는 사회적 낙인과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타락한 세상에서 순수하게 사랑했고, 상처받더라도 다시 사람을 믿었고, 치밀하거나 계산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던 삶.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훼손되는 경험 속에서 계속해서 상처받기보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덤덤한 척 연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마츠코는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그 속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으려고 한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는 어둡고 축축한 현실과 대비되는 그녀의 내면이나 감정 상태를 보여줄 때 화려한 색체와 동화적인 이미지, 과장된 음악을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잔혹하고 슬픈 부분은 마츠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은 희망이 마지막까지 좌절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츠코는 어두운 방 안에서 끝없이 먹고 마시며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삶을 지속하다가, 어느 날 여동생 쿠미의 머리를 매만지는 상상을 하며 허공에 가위질과 빗질을 한다. 아직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때 마츠코는 메구미를 떠올린다. 그녀가 준 명함을 찾기 위해 강가로 가서 명함을 찾고 손에 쥐었을 때, 그녀는 동네 중학생들에게 야구 배트로 머리를 가격당해 죽는다. 마침내 살아갈 방향을 조금 알 것도 같았을 때, 그녀의 삶은 허무하게 끝나 버린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그녀를 낙오자, 실패자로 치부했지만 마츠코는 어둠 속에서 계속 빛을 찾아나섰던 사람, 죽기 직전까지도 희망을 믿었던 사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녔던 사람이다. 그녀와 엮인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마츠코의 일생은 과연 누군가의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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