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여행 중 현지 친구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 ‘오렌지(ส้ม)’였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시작인 것 같은 설렘이 있었다. 한동안 나의 닉네임은 오렌지로 채워졌다.
마침, 다음 읽을 책을 고민하던 찰나, 추천 받은 책이 『오렌지와 빵칼』이었다. 이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 어떠한 촘촘한 계획이 없었음을 미리 밝힌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귀엽고 통통 튀는 에세이일까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배신이면서,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200페이지 안쪽의 가벼운 분량이지만,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약간의 불쾌함, 통쾌함, 적어도 오렌지의 상쾌함은 찾아볼 수 없는 책이다. 비유하자면 잘 들지 않는 빵칼로 오렌지를 자르며 끝내 손에 과즙만이 남는 기분이랄까. 마침내 자르는 데 성공하더라도 느끼게 될 덧없는 쾌감일지도 모른다.
얼핏 리뷰를 찾아보니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말이 맘에 안 드는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럼에도 책은 꽤 술술 읽힌다. 매끄러운 문체와 단단한 구조 덕분이다. 인터뷰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작가의 퇴고 철학이 인상 깊다.
쉽게 읽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외서를 읽다가 문장이 길고 어려워서 화가 났던 적이 있다. 물론 나의 부족한 문해력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국어로 된 글을 읽었음에도 이해가 좌절되는 순간 책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다. 내 책을 읽는 독자님은 당신의 문해력과 상관없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출처 : 채널예스, [젊은 작가 특집] 청예 “쉽게 읽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찝찝함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침잠하기보다는 계속해 돌을 던져 진창을 보고야 마는 책이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인물의 기질과 성격, 뇌 시술을 통해 인물이 바뀌는 판타지적 요소가 장점이고, 단점이다. 200페이지 안쪽으로 정리되는 세계관, 인간의 외면과 내면, 선과 악, 자기방어와 자기파괴의 경계를 오가는 것이 장점이고, 단점이다. 어쩌면 이 책이 불쾌감에 골을 내는 지점은 독자가, 인간이 외면하고 싶었던 양면성과 모순일 것이다.
최근에 접한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개념이 『오렌지와 빵칼』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로테스크는 기괴함, 두려움, 역겨움, 혐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적 요소를 의미하지만, 단순히 불쾌한 것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모순, 사회적 금기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오렌지와 빵칼』 또한 그로테스크의 정서가 묻어난다. 책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건 단지 책이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자기 내면의 부정(不正) 혹은 부정(不淨)과 마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로테스크의 순기능은 ‘마주침’이다. 실재를 직면하지 않더라도 예술을 통해 그 주변의 만남을 가장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176페이지만큼의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의 말』이 너그러운 용서를 부추긴다. 작가 청예가 제시한 문학의 분류(보편유익, 특수유익, 특수무익, 보편무익)에서 『오렌지와 빵칼』은 특수유익에 더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기꺼이 자신의 부정(不正) 혹은 부정(不淨)을 작품에 녹여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로테스크를 좋아한다. 내게는 감히 없을 도전이기에.
“You nailed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