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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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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나 어딘가에 머무렀다 떠나가며 마음을 두고 온다. 꼭 장소를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서도 그렇다. 그 마음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감정도 있다.

 

나는 얼마 전에 한 가지 이별을 했다. 사람과의 이별은 아니고 어떤 추억과의 이별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새로 주어지기는 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서, 모든 과거가 그렇겠지만 그 추억은 조금 다르다. 완벽하게,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이별 중에 한동안은 정신을 놓고 지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미 알고 있는 정해진 결말을 두고 아닐 것이라 외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잠으로 도망친다던데 나는 이상하게 자는 게 싫었다. 곱씹다 보면 나아질 것이라 착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럼에도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근처 시골에 며칠 다녀왔다. 집과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이동하고, 몇 십 분을 더 걸어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에 가족들과 함께 몇 번 간 적이 있었기에 낯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이 달라져 있어서 많이 놀랐다. 그때는 없었던 편의점이 생겼고, 텅 빈 집이 있던 곳은 집이 사라진 뒤 경로당 비슷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던 곳은 멀끔하게 정리되어 돌담을 쌓아놓고 있었다.

 

처음 그곳에 간 이틀 동안에는 그 주변을 생각 없이 걸었다. 4월부터 여름이 시작된다고 하길래 겁을 먹고 있었는데 덥지도 않고 바람이 선선하고 날씨가 좋은 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한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앉아 있는데 마실을 나오신 할머니께서 슈퍼 할머니를 불러 그 앞에 나와 담소를 나누시는 것이었다. 편하게 대화하실 수 있게 자리를 피해드릴까 했는데 급히 자리를 뜨려는 게 들킨 건지 더 앉아 있다 가라고 하셨다.

 

두 분은 오늘 일을 얼마나 했고, 밭일이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를 나누시다 한 번씩 나한테도 말을 걸어 주셨다. 어디서 사는지, 어쩌다 왔는지, 몇 살인지. 나에 대해 알고 싶은 의도는 아니고, 난생 처음 보는 청년이 있으니 별 의미 없이 여쭤보신 것일 거다. 그때 어떤 생각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생각이 많아서 쉬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할머니들은 내 말을 듣고 그런 말씀을 해 주셨다. 자기 아들도 그때는 그랬다고, 생각이 많을 때이기는 하지만 지나고 보면 별 일이 아니게 된다고. 그분들보다 삶의 굴곡도, 지혜도 적은 나지만 그것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였다. 지금에나 힘들지. 다 겪고 나면 이겨낸 한 시련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왠지 울어버릴 것처럼 위안이 됐다.

 

원래는 그곳에서 그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올 생각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들은 후로 그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정리된 것처럼 감정이 정리되었다. 더이상 복잡하지도 결말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남에게 나의 그간의 고민과 모르는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을 털어놓으니 그는 내게 내가 그곳에 복잡한 마음을 두고 온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이번 짧은 여행 후에 다시 깨달은 게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과 어떤 감정이든 버릴 수 있다는 것. 영영 붙잡고 싶은 것도 시간이 흐르고 마음을 먹으면 버릴 수 있게 된다. 그게 언제 다시 떠오를지언정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행복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이 나에게는 버릴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변해 버린 것을 인정하는 게 어려웠고 변한 원인을 찾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여행을 가는 등 새로운 변화를 준다고 한다. 그것들이 다 결국은 무엇인가를 비워내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싶다. 비워내야 새로운 것이 채워질 공간이 생긴다는 걸 모두가 안다. 붙잡고 있는 게 나를 아프게 한다면 기꺼이 비워내보자. 어떤 것이든 두고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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