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좋아하고 매일같이 듣지만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케스트라가 주는 힘은 여타 다른 악기 연주가 합쳐진 것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는 걸 알고 있으나 직접 들으러 간 적은 손에 꼽는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잘 모르기도 하고, 어느 순간부터 공연장에선 일단 뛰고 보는 사람이 되어 조용히 감상하는 공연을 멀리하게 된 탓이다.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온 공연이 바로 <지브리 페스티벌>이었다.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돌려봤던 <이웃집 토토로>부터 듣기만 해도 장면이 재생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깊숙이 각인된 몇 안 되는 영화였고 그 OST를 오케스트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라 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은 인터미션을 두고 2개의 테마로 나뉘었다.
1부에서는 지브리 OST에 클래식이 더해진 편곡 버전이 연주되었고, 2부에서는 오리지널 OST가 연주되어 풍성하게 120분을 채웠다. 지휘는 모스크바 챔버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한 안두현 지휘자가 맡았고, 연주는 정통 클래식부터 영화 OST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아르츠심포니오케스트라가 담당했다.
다른 오케스트라 공연과 차별점이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첫 번째 순서였다. 익숙한 OST가 변주되어 다르게 들렸기 때문. 첫 곡으로 <이웃집 토토로> OST인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연주될 땐 드뷔시의 ‘꿈’이 더해져 감성적인 느낌이 배가되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언제나 몇 번이라도’에선 비발디 ‘사계’의 ‘가을 3악장’이 더해져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뒤로도 리스트, 쇼팽, 라벨과 같은 작곡가의 곡이 더해져 색다른 매력을 전달했다.
1부에서 메인 멜로디를 담당한 송영민 피아니스트의 활약이 돋보였다. 유려한 연주와 더불어 2곡이 끝날 때마다 편곡에 대해 짧게 해설을 덧붙인 그는 이번 공연이 다양한 클래식 음악과 OST 사이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고전적인 연주곡과 친하지 않은 사람도 공연장으로 불러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실제로 공연 당일 어린 아이와 함께 온 가족 단위 관람객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가지는 특유의 우아하고 정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던 사람들의 모습은 공연의 창작 의도가 성공적으로 실현된 결과였을 것이다.
2부에선 본격적으로 오리지널 OST를 들을 수 있었다. 첫곡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어느 여름날’에선 은은한 피아노 연주가, <벼랑 위의 포뇨>의 대표 OST에선 웅장한 팀파니 소리가 가장 와닿았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로 내달리는 느낌을 한껏 고조시킨 <이웃집 토토로> OST ‘고양이 버스’까지 연주되는 곡마다 존재감을 뽐내는 악기가 제각각이었고, 이들이 한데 뭉칠 땐 층층히 쌓인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오케스트라가 가진 소리의 울림을 다시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연주 중간중간 애니메이션 일부를 VCR로 보여준 부분은 몰입을 돕는 요소로 작용했다. 떠오르는 장면을 보며 과거의 향수를 되새기기도 했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만큼 공연을 보러 온 각자는 지브리에 많은 애정과 추억을 가지고 있을 터.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상과 음악이 교차될 때만큼은 모두가 애니메이션을 보던 그때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주가 남긴 파동에 공명한 공연이었다. 이전에 경험한 클래식 공연에서 웅장한 소리에 압도된 느낌을 받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애니메이션 OST가 가진 따뜻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한몫했겠지만, 그 이면에 서린 추억이 소리를 더욱 아름답게 포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게 음악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들었는지 그 순간을 그대로 불러오는 것. 눈앞에 펼쳐지지도 않는 청각의 예술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다. 일요일 오후 펼쳐진 클래식과 애니메이션계의 ‘클래식’의 만남이 선명히 마음에 남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