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유한하기에 더 아름답고 애틋하다. 삶을 다루는 수많은 시와 노래들은 그 유한함을 두려워하면서도 찬미한다. 삶엔 반드시 끝이 있고, 그 끝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니 오늘을 후회 없이 뜨겁게 살아내라고 말한다.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며 번쩍이다 순식간에 까만 재로 변해 사그라지는 게 생이기에 그 허무함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은 언젠간 반드시 끝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사랑만은 영원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히 남는 것일까. 생명이 꺼질지라도, 그 사람의 아름다운 말들과 영혼은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는 걸 증명해 준 인물이 있다.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1897년 발표한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주인공 시라노의 헌신적인 사랑과 고귀한 영혼은 낭만이 사라져가는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남았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발레, 드라마, 영화까지 전 세계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여러 차례 재창조됐다. 2025년 10주년을 맞이한 국립극단 청소년극 대표 레퍼토리 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도 그중 하나다. 2025년 4월 10일부터 4월 27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청소년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는 록산느 역에 최하윤, 시라노 역에 장석환, 크리스티앙 역엔 안창현, 드기슈 역할에는 도준영, 뱅상 및 병사 외 다역엔 이정희, 세실 및 여인 외 다역엔 원빈이 출연하고 있다.
2015년 초연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각색을 맡은 작가 김태형은 '시라노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상인 록산느를 무대 가운데로 데려와 시라노와 나란히 서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시라노가 평생을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여성으로만 록산느를 다루는 게 아닌, 격동의 시대와 비극적인 운명에 맞서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록산느를 재탄생시킨 것이다.
서충식 연출가의 말에 따르면, 작품의 기원은 초등학생을 위한 작은 순회 연극부터였다고 한다. 그 후 국립극단에서 청소년을 위한 연극으로 연령대를 높여 제작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른 것이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소속 청소년 17명 또한 극을 함께 만들었으며, 극에서도 청소년이 연상되는 오브제들(무대 소품인 사다리와 밧줄,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시라노와 드기슈의 펜싱 장면)을 활용했다.
극에선 주인공 록산느가 10대라는 대사가 나온다. 실존 인물이었던 시라노가 극 중 전쟁을 치르고, 부상당한 나이가 21살이었기에 극 초중반까지 록산느의 나이가 10대인 건 당연하다.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에서는 시라노와 록산느가 오랜 소꿉친구란 설정으로 각색됐지만,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원작에서 그들은 친척 오빠와 동생 사이였기 때문이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란 같은 원작을 변주하여 만든 여러 작품과는 달리, 이처럼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는 실제 시라노와 록산느의 나이를 극에 반영했기에 청소년극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은 청소년 관객이 봐도, 청소년기를 지나온 성인 관객이 봐도, 심지어 청소년이 될 어린이 관객이 봐도(원래 초등학생을 위한 연극이었으니) 무리 없이 탄탄하게 만들어진 수작이다.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는 청소년극이며 청춘 성장물이다. '낭만 활극'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극의 초반은 활기차고, 역동적이며, 장난스럽고, 생명력 가득한 푸른 봄 같다. 록산느를 봄에 비유한 대사처럼, 주요 인물인 록산느, 시라노, 크리스티앙, 드기슈는 극의 초중반까지는 미완성된 풋풋함과 미숙함, 서투름과 치기를 보여준다.
극의 첫 장면에서 시라노, 크리스티앙, 드기슈 삼총사는 객석 통로에서부터 등장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관객 호응을 유도하기도 하고(시라노는 관객에게 분장한 코를 만져보라고 시키기도 한다), 객석 분위기를 환기하며 빠르게 자신들 소개를 마치고 극으로 들어가는 첫 장면은 영리하게 구성됐다.
극은 원작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청춘 성장물인 초중반(시라노, 크리스티앙, 드기슈가 출전하기 전까지)은 하이틴 드라마가 연상되는 인물 구도 및 대사들을 의도적으로 연출해 친근감과 웃음을 유발했다.
극 중 록산느는 자신의 인기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예쁘지만 털털한 여학생 같고, 시라노는 그녀를 짝사랑하지만 오랫동안 친구였기에 못 다가가는 남학생이자 남자 주인공, 크리스티앙은 잘생긴 외모로 록산느와 시라노 모두를 긴장시키는 남학생, 드기슈는 재력으로 록산느의 마음을 사려 하는 나쁜 선배 같다. '사귀쟤? 콜!', '록산느, 정말 짱이야!'처럼 잘생긴 얼굴과 다르게 입만 열면 가벼워지는 크리스티앙의 캐릭터 또한 직설적이고 가벼운 대사들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극 중후반, 즉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시점부터 분위기는 정반대로 바뀐다. 초중반이 하이틴 드라마였다면, 중후반은 묵직한 정극 및 멜로로 전환되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굶주림과 공포를 견디며 전투하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시라노가 크리스티앙 이름으로 쓴 편지를 안고 두 계절을 사랑의 열병을 앓다 가방 하나 메고 전쟁터로 달려가는 록산느까지. 저마다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는 모습에선 철없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지키고, 버티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때론 진심을 감추며 성장하고 어른이 된다.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에서는 록산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그녀의 서사와 주체적인 캐릭터성에 공을 들였다. 극에서 록산느는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전쟁 중 군대에 식료품을 납품할 것을 강요받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수익을 포기하고 전쟁에 반대한다는 신념을 지킨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유포한 시인 검객인 시라노와 결이 같은 '여자 시라노'가 록산느인 것이다.
또한 록산느는 식량 가방을 메고 전쟁터로 가던 중, 적국의 여인을 만난다. (김옥란 드라마투르그의 말에 따르면 록산느가 만난 적국 병사의 아내는 스페인 난민이다. 또한 이 설정은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버전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장면이다.)
록산느는 아기를 안고 있는 그녀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총까지 건네는 록산느. 그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 채 선의를 베푸는 록산느의 모습에선 연민과 동정심, 인류애와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비극은 나비효과처럼 커지지만, 그녀의 선택이 결코 잘못된 건 아니다. 당장 몇 시간 후도 장담 못 하는 전쟁 중 록산느가 한 행동은 더없이 용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푸른 새싹이 움트는 봄이 극의 초중반, 낙엽이 떨어지고 생명이 시들어가는 가을이 극의 중후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극에서만 볼 수 있는 엔딩 장면에선 다시 봄이 찾아온다. 사랑만이 가장 큰 고민이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들은 록산느의 마음속에서나마 행복하게 재회한다. 원작에서도 시라노를 상징하는 중요한 오브제였던 달을 관찰하는 록산느의 눈에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은 찾아볼 수 없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록산느의 눈에선 여전히 희망찬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청소년극에 어울리는 엔딩이면서도, 비극 속에 산 인물들을 안아주는 따뜻한 장면이기도 하다.
극에선 록산느와 시라노가 소울메이트라는 것을 아름다운 대사들을 통해서도 보여준다. 그들은 정서적으론 연인과 다름없다. 진실을 감추고 진심을 드러낸 시라노의 편지를 읽고 록산느가 사랑의 열병을 앓는 건 당연한 결과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보낸 영혼의 고백을 듣고 글의 주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젠 흔한 말인 '영혼 없다'란 말과 반대로, 시라노는 흘러넘치는 사랑과 영혼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며 크리스티앙 이름 뒤에 숨었을 것이다. 록산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오직 진실한 마음만을 바치기 위해서다. 아직까지도 손으로 편지를 쓰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시라노의 마음과 같다.
공과 시간을 들여 오래 써야 하는 편지엔 마음의 본질이 담겼고, 극장까지 찾아가 몇 시간은 조용한 객석에서 집중해야 이야기의 본질에 닿을 수 있는 연극은 거울처럼 닮았다. PC와 핸드폰, 태블릿 PC 등 쉽고 빠르게 글을 쓸 수 있는 수단이 넘쳐나고, 각종 영상 및 공연을 비롯한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편지와 연극은 번거로움과 긴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없이 순수한 본질,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게 편지와 연극이다. 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의 록산느와 시라노가 편지로 서로의 영혼을 알아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