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친구들과 노을이 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사 먹었던 기억, 화가와 선생님이 되고 싶어 열심히 그림 그리고 소꿉놀이했던 기억. 그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아침과 저녁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시청하던 추억의 만화들일 테다.
다들 각자의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만화 하나씩 품에 간직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나에게는 특이하게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만화가 있었다. 바로 <짱구는 못말려>. 당시 ‘짱구’는 버릇없는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와 못된 행동을 배울 수도 있는 만화라는 인식 때문인지 나는 짱구를 보기만 해도 부모님께 냉큼 혼이 났다.
하지만 그 시절을 누가 말리겠는가. 몰래 채널을 돌리는 척하며 짱구가 나오는 채널을 두세 번 스쳐 지나가듯 보기도 하고, 부모님이 없는 틈을 노려 짧게 시청하기도 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나도 참 못 말리는 아이였구나 싶어 웃게 된다.
이처럼 나에게 있어 짱구는 나름 애틋한 만화였지만 어른이 되자 세상에 볼 수 있는 콘테츠가 너무 많아졌다. 어릴 땐 유난히 느리게만 흘러갔는데 시간도 나와 함께 자라는지 더 이상 서투른 법이 없다. 시간마저 빠듯해진 지금, 짱구는 나에게 있어 그저 추억 속에 머무르는 만화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짱구는 문구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귀여운 캐릭터로만 남게 된 어느 날, 어릴 적 채널을 스치며 봤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왜 하필 그 장면이었을까. 마치 현실에 낙담한 내게 어린 시절의 내가 신호라도 보내듯.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 채로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을 보게 되었다.
향긋한 향수, 지독한 발 냄새
떡잎 마을에 20세기 박물관이 생기고 어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20세기의 향수에 취해있다. 짱구 아빠 신형만과 엄마 봉미선은 어릴 적 되고 싶던 히어로와 마법소녀가 되어보기도 한다. 마치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20세기 박물관에 매료되고 떡잎 마을 아이들은 그런 부모들이 낯설기만 하다.
꿈과 희망은 없고 그저 돈과 욕망만이 가득한 21세기. 꿈꾸던 미래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 21세기. 그렇기에 세상을 다시 깨끗한 마음이 존재하던 20세기로 되돌리고자 하는 조직의 리더 켄은 그리운 20세기의 냄새를 퍼트려 어른들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세뇌된 듯 어른들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조직은 그런 어른들을 모두 트럭에 태워 박물관으로 보낸다.
아이들만이 떡잎 마을에 남게 되고, 짱구와 아이들은 결국 부모님을 구하러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짱구는 어린 시절의 신형만을 만난다. 짱구는 아빠를 되돌리기 위해 아주 강력한 수단인 ‘냄새’를 사용한다. 바로 신형만의 무시무시한 발 냄새를 맡게 하는 것. 이는 켄이 사람들을 세뇌하기 위해 사용한 수법과 같은 방식이다. 신형만은 그 냄새를 통해 인생의 주마등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빠 신형만으로 돌아온다. 엄마 봉미선도 발 냄새를 통해 돌아온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과거의 향수에 취하려고 할 때마다 취하는 방법은 ‘발 냄새 맡기’가 된다.
앞서 말한 이 극장판을 보게 한 장면은 바로 짱구 가족이 계단을 계속해서 오르는 장면이다. 켄은 짱구 가족에게 미래를 직접 구해보라며 그들을 보내준다. 그의 애인 미셸이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켄은 이렇게 답한다. “최근 들어 뛰어본 적이 없군.” 실제로 켄과 미셸은 20세기 향수를 전국에 퍼트리기 위한 장치를 작동하기 위해 20세기 박물관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다. 그에 반해 짱구네는 온몸에 땀이 나도록 뛰고 계단을 오르며 그들을 막으려 한다.
과거를 바라보며 과거에 머물고자 하는 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지만, 미래를 바라보고자 하는 자는 땀방울을 흘리며 뛴다.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오른다. 향긋하고 현혹되는 그리운 과거의 향수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지독해져 버린 신발 속 악취의 대비.
현실은 항상 그런 모습이다. 엉망진창이다. 너무 높은 계단을 오르느라 발에 땀이 나는지도 모르는 그런 모습. 이리저리 굴러 흙과 상처투성이인 모습. 그럼에도 올라갈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똑같은 계단과 똑같은 하루를 지치도록 오르다 보면 갇혀버린 것들은 악취를 내뿜는다.
하지만 신형만의 하루 끝에는 문을 열며 반기는 봉미선과 달려 나오는 짱구와 짱아, 반가운 듯 짖는 흰둥이가 있다. 장난스레 아빠의 발 냄새를 맡고 쓰러지는 아이들을 보며 웃을 수 있는 신형만이 있다. 정겹고 그리운 길목, 저녁노을과 구수한 찌개 냄새, 어딘가 그리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추억의 향수.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리운, 또 그리워질 순간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곁에서 다양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꿈과 희망의 출처, 동심방범대: 어른들
떡잎 마을의 어른들이 모두 박물관으로 가자 마을에는 어린아이들만 남게 되었고, 어른들이 사라지니 세상은 마치 암전된 것처럼 멈춰있게 된다. 이 장면에서 극적으로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은 어른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
나의 마음을 크게 울렸던 장면은 바로 짱구가 켄과 미셸을 붙잡는 장면이었다. 짱구가 엉망진창이 된 채 장치를 향해 걸어가는 켄의 다리를 붙잡는 장면 속 디테일이 가장 눈에 띈다. 짱구는 뿌리쳐짐에도 두 사람을 세 번 붙잡는데, 이때 두 사람의 표정 변화 또한 세 번 변화한다. 첫 번째는 ‘뭐지?’ 하는 시선, 두 번째는 어딘가 결연한 표정으로 앞만 응시. 하지만 세 번이나 붙잡히자 미셸은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빨리 어른이 돼서 누나처럼 예쁘고 섹시한 여자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단 말이에요!”
짱구의 설정값을 유지하며 외친 대사지만 그 안에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가 녹아있다. 아이들이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어른을 보며 꿈을 키우기 때문이라고.
알게 모르게 나에게 많은 꿈과 희망을 심어준 수많은 어른을 기억해 본다. 산타가 있다고 믿던 어린 시절, 머리맡에 36색 색연필을 몰래 두어 다채로운 색이 있는 하루를 만들어 주고, 또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매번 이부자리를 곱게 펴준 부모님과 잠시 나에게 유치원 선생님의 꿈을 안겨준 나의 다정한 선생님, 넘어져 다쳤을 때 괜찮냐며 한걸음에 달려와 준 이름 모를 어른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어쩌면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해 본다. 사라진 듯 보였던 꿈들이 사실은 또 다른 땅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것이라고, 하루의 땀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또 다른 하루를 자라나게도 한다고, 미래에도 또 다른 꿈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이 만화를 나는 앞으로 지친 하루 끝에 시간 내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