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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는 뇌외과 의사 ‘카와우치 미야비’가 1년 반 전의 교통사고 이후, 하루가 지나면 기억이 초기화되는 특별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녀는 매일 자신의 기억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며, 기억 대신 '기록'으로 삶을 이어간다.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은 익숙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의사로서의 역할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의 일상은 이 작품만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처음에 미야비는 스스로를 온전한 의사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환자보다는 동료들의 간호 보조의 일을 도맡으며 뒷걸음질 친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과의 ‘산페이 토모하루’가 그녀 앞에 나타나며 미야비는 조금씩 다시 ‘의사로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기억이 곧 나인가?
하루가 지나면 모든 걸 잊는다는 건,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야비는 항상 미야비였다. '기억이 곧 나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뇌 속의 데이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억만으로 '나'가 결정된다면, 미야비는 매일 아침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똑같이 의사 가운을 입고, 환자를 마주하며, 책임감을 느낀다.
그녀 안에는 기억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 매일 '내가 의사라는 사실'을 읽고,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는 단지 기억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그녀의 성격, 가치관, 그리고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기억은 '나'를 설명하는 한 조각일 뿐이고, 나를 진짜로 만드는 건 내가 선택하는 태도와 어떤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반복되는 행동이라고 믿는다. 기억이 사라져도 매일 '같은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일 수 있다.
"강렬한 감정은 잊히지 않죠. 기억에서 사라지더라도 그때 느낀 감정은 남아요."
"카시와기 씨는 아내분이 오면 자다가도 깨어난다. 요시미 씨를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어서다. 잃지 않는 것도 분명히 있다."
'일'이라는 삶의 중심
《언멧》의 미야비는 왜 계속 일할까? 기억이 날마다 사라지는데도, 그녀는 매일 병원으로 향한다. 심지어 자신이 진짜 의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의심하면서도 말이다. 그녀의 모습은 묻게 만든다.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지? 이게 내 삶에서 진짜 중요한가? 이런 질문들은 단지 게으름에서 나오는 회의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일=삶'이라는 공식 안에 갇혀 살아왔던 구조에 대한 의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일이라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미야비가 계속 병원에 나가는 이유는, 단지 기억해 내서가 아니라 '내가 의료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태도와 의지 때문이다.
에디터 본인은 아직도 고민 중이다. 다만 하나 확신하는 것이 있다. 일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지만,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는 될 수 있다.
당신의 전전두피질에 내가 있다면
《언멧》은 기억보다 더 강한 '관계'의 힘을 조용히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의료진이 환자를 고치는 이야기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을 치유하는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병원 사람들은 매일 기억을 잃는 미야비에게도 처음처럼 자기소개를 건넨다. 연수의 카자마는 늘 이름표를 꺼내 보여주며 다정하게 자신을 다시 설명하고, 산페이는 며칠 내내 양배추 말이를 건네받으면서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감사히 받아먹는다. 그 따뜻한 반복은 '나'라는 존재를 다시 이어주는 조용한 노력이다.
초반에 간호부장 츠바타 레이코는 미야비의 의료 참여를 반대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녀가 미야비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미야비가 자신의 얼굴에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미야비가 자신을 믿고 스스로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자, 레이코도 그녀의 의료 행위를 도와주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며 관계를 조금씩 회복해 간다.
누구나 불완전하지만, 서로가 있기에 채워질 수 있다. 《언멧》은 부족한 부분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빛이란 건 자기 안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어둠도 밝게 보일 테니까요. 이렇게 하면 그림자가 사라져요."
"산페이 선생님은 나한테 빛을 비춰 줬어요."
"내측 전전두피질이라는 뇌 부위가 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는 역할을 해요. 그런데 소중한 사람이나 사귀는 사람은 자기와 구별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마치 자신처럼 여긴다는 거죠."
"그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내측 전전두피질에 존재한다는 얘기죠?"
이야기를 마치며
기억은 사라져도, 다정한 반복은 남는다. 《언멧》은 그 다정함이 얼마나 강한 힘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매일 같은 인사를 반복하고, 어제의 나를 잊고도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 그건 단지 생존이 아니라 삶이다. 《언멧》은 그 조용한 용기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