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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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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성'을 읽고 글을 쓰는 지금, 문득 최근에 했던 미로찾기 하나가 떠오른다. 그 미로찾기는 아파트 입구에 들어가는 소년이 아파트에서 꼭대기쯤에 위치한 가까운 자신의 방을 찾아가는 퍼즐이었다. 자신의 방을 가기 위해서 소년은 아주 복잡한 미로를 빠져 나가야했다. 잘못된 길이 막다른 길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방에 침입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 흥미로웠다.

 

미로찾기를 하는 동안 소년-혹은 나-은 합리적 판단에 의존해 미로를 해결했지만, 확신에 차서 따라간 길마저 번번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뒷걸음쳤다. 꼭대기에 있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자주 불청객이 되어야 했다. 방에 도달해야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가는 길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한 붉은 여왕과 함께 달리는 것처럼,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방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유형의 놀이에서 소년은 언젠가 방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늘 행복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미로찾기와 다르게 내밀한 삶의 문제는 안락한 방과 같은 도착 지점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왜 삶에서 헤매는가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목적 없이 태어난 후 언어에 의존하여 삶의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삶을 완전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에 더불어,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얼마나 우스울 정도로 부조리한가. 내가 글을 쓰고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이 순간 시시각각에도 정치와 경제, 우리 시대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사상이 크고 작게 수많은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시대의 흐름에서, 아니 하다못해 공동체의 아주 작은 집단에서도 타인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기 때문에 고독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들로 구성되어 무시무시한 봉을 휘두르는 리바이어던은 문명의 수호자가 아닌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

 

사람들은 거대한 체계의 일부가 되고 싶으면서도, 그 안에 휩쓸릴까 봐 두려워한다. 모든 시대에 카프카가 있다곤 하지만, 자본이 대체 불가능한 가치로 자리 잡아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모욕적인 변명을 일삼으며 타인과 자신을 갉아먹는 요즘 시대야말로, 출구 없는 악몽을 헤매는 것 같은 카프카의 글이 가슴 아플 정도로 잘 읽힌다.

 

카프카의 글이 잘 읽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소한 나에게는-앞서 말한 퍼즐과 엮어 말하자면- 영원히 방에 들어갈 수 없는 소년의 마음에 이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성'에서 성은 소년의 방과 같다. 소년의 방처럼 성 역시 주인공 K에게 받아주고 인정 해주는 공간이기에 도달하고 싶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K를 감시하고, 모욕하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을 대하는 K의 마음은 어떨까? 성에 너무나 도달하고 싶으면서도, 도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의 '성'은 그 끔찍한 방황과 관료 시스템의 무능함과 무자비함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지나친 고통에서 묘한 조소가 흐른다. 그 조소야말로 그 세계에 삼켜지지 않고자 하는 K의 의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의 가장 밑바닥에는 수치심과 무력감이 있다.

 

이러한 감정을 녹여낸 작품이기에, 소설 '성'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를 막연하게 기다렸던 것처럼, K는 45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 동안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지루하고 유치한 행정절차와 지난한 말과 언어적 학대 사이에서 떠돌기만 한다.

 

*

 

전체적인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K는 토지 측량사로서 부름을 받아 마을에 도착해 여관에 묵지만, 여관의 젊은이 슈바르처는 그를 거칠게 깨우면서 마을이 토지 측량사를 부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한밤중에 깨어난 K는 자신의 조수들이 도구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확인을 요청한다. 성과 확인 전화를 후에야 K는 성의 토지 측량사로 임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전화를 건 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K는 자신의 입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성에 걸어서 가려고 한다. 하지만 K가 성에 가려고 해도 성은 안개에 가려져 있어 희미한 빛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 닿을 수가 없었다.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인 무두장이와 선생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야박한 태도로 그를 대한다.

 

허탕을 치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조수를 자처하는 아르투어와 예레미아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아무런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익살스러운 태도로 사사건건 K를 방해하기만 한다. 조수와 만난 후에야 K는 마침내 성의 대표 관리이자 사무국장인 클람으로부터 편지를 전해주는 심부름꾼 바르나바스로부터 편지를 받지만, 편지는 묘한 천대의 태도가 묻어나 있을 뿐, 그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누구를 만날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있지 않았다. 그의 상관이라는 사람도 성의 관리가 아닌 마을의 촌장에 불과했다. 성은 그가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가를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K는 바르나바스가 클람이 있는 성에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그와 함께 귀가하지만, 바르나바스는 성에 가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K는 내심 실망하지만, 바르나바스의 집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환대한다고 느낀다. K는 바르나바스의 여자 형제인 아말리아와 올가를 소개받는다. K는 여관에 돌아가는 대신 올가와 관리들이 먹고 마시는 여관의 주점인 헤렌호프로 간다. 그곳에서 클람의 애인인 프리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K와 사랑에 빠진 프리다는 K와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한다. 프리다를 각별히 아낀 여관여주인은 그런 프리다를 말리고 K가 그녀의 삶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K는 이제 프리다의 결혼을 허락받고 토지 측량사로서의 업무를 배정받기 위해 마을 촌장을 찾아간다. 촌장은 측량사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길고 까다로운 관료적 절차에 의해 착오가 발생하여 K가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K는 너무 먼 길을 전 재산을 쏟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K를 위해 특별히' 촌장의 '호의'로 남선생은 K에게 학교 청소부 일자리를 제안한다.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교실에서 생활하고 남선생과 여선생의 천대를 견뎌내야 하는 악조건의 직업이었지만, 프리다의 설득으로 K는 그 직업을 받아들인다.

 

K는 다시 클람을 찾기 위해 헤렌호프로 가지만, 클람을 만나기는 커녕 클람의 수많은 비서 중 한 사람만 조우한다. 비서는 클람을 대신해 K와 면담하겠다고 하지만, K는 거부한다. K는 마을에서 무익한 시간을 보내지만, 클람으로부터 유능한 조수들과 토지 측량사 일을 잘 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는다. K는 자신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클람의 편지에 분노하며, 바르나바스에게 자신의 말을 반드시 전달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한편, 학교에서 조수들이 창고를 부숴 남선생으로부터 K를 해고하게 만든다. 화가 난 K는 똑같이 조수들을 해고하고, 조수들은 울면서 그를 떠난다. K는 바르나바스로부터 클람의 회신을 받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바르나바스는 없고, 아말리아와 올가만이 있었다. 올가는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의 유혹을 뿌리친 결과로 자신의 가문이 몰락했다고 이야기해 주며, 지금까지 클람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던 바르나바스는 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심부름꾼 역할을 자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바르나바스는 직접 클람을 만난 적조차 없었다.

 

프리다는 K가 올가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불륜으로 오해하여, 조수 중 한 명인 예레미아스와 약혼한다. 예레미아스는 프리다의 오랜 친구였고, 그녀는 다시 주점으로 돌아가 직업을 갖는다. 조수 예레미아스는 이전과 달리 익살스러움 없이 자신들이 K가 아니라 클람의 비서인 갈라터에게 고용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다.

 

예레미아스가 떠나자 바르나바스가 클람의 수석비서인 에어랑어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한다. K는 에어랑어를 찾으러 가지만, 에어랑어는 보이지 않고, 복도를 따라 방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어 헤맨다. 클람의 수많은 비서 중 하나인 뷔르겔의 방에 들어가고, 잠에서 깬 뷔르겔의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며 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옆방에 있는 에어랑어를 만나는 데 성공하지만, 그로부터 '프리다와 만나지 말라'라는 짧고 성의 없는 말만 하고 가버린다. 소설은 성으로 들어가는 것에 좌절감을 느껴 마을로 돌아온 k가 게어슈테커의 어머니가 입을 여는 말을 들으려던 중 끝난다.

 

*

 

줄거리만 읽어도 느껴지듯, 카프카의 '성'은 일반적인 소설과 거리가 멀다. '성'에는 소설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서사구조 거부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목표는 불분명하고, 모든 사건과 인물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고 행동한다. 작중 인물들은 지루한 대사를 지나치게 길게 말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냉대를 보이기도 한다.

 

꿈을 해석하는 것이 난해하듯, 이 소설의 해석도 난해하다. 하지만 막상 '성'을 읽다 보면 묘하게 강렬하게 경험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이 소설을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카프카의 '투쟁기'라고 읽으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카프카는 자신의 삶이 문학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삶을 말 그대로 '문학적인 표현'으로 묘사했다기보다, 불가능한 삶의 이해불가능함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본다. 카프카가 소설 '소송'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죄를 선고받고 개 같이 죽음을 당한 상황처럼 말이다.

 

이런 카프카의 접근 방식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의지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성의 비유를 빌려온 것이 떠오른다(마침 둘다 '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원인학적인 설명이 한계에 다다르는 곳에 비로소 형이상학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표상 인식의 한계와 새로운 세계의 파악 방법을 성의 비유를 들었다. 성문 밖에서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비밀통로를 통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외부 대상의 인식, 충분근거율을 따르는 표상 인식의 방법으로는 사물의 내적 본질에 도달할 수 없고, 사물의 내부를 통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성의 비밀통로로 들어가는 방법을 신체를 통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체의 반응, 신체의 운동이 충분근거율로 이해할 수 없는 의지가 객관화된 표현이 가시화되었다고 보았다. 배가 아픈 것을 통해 배가 아픈 것을 아는 것이나, 떨릴 때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처럼 신체는 말 그대로 욕망과 상응하는 것이고, 가시적인 표현이다. 의지의 그 내적 본질만은 알 수 없지만 신체의 운동이 의지의 객관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는 방식이 소설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 흘러나고 미세하고 잡스럽지만 동등한 무게를 갖는 소리들을 그대로 옮긴 카프카의 투쟁이 꽤 비슷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인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구조로는 이러한 경험을 선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카프카의 '성'은 진정으로 성 내부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아주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이라고 본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카프카의 '성'은 카프카의 몸이다. 배가 아픈 감각에 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내부 본질은 알 수 없는 것처럼, 끝없이 흘러나오는 우리의 불안을 그대로 옮기면 카프카의 '성'이 된다. 카프카는 그것을 해체하여 하나하나 해석하는 대신, 흘러나오는 소리를 섬세하고 예민하게 포착하여 그대로 옮겼다. 이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가 인지하고 옮겼던 소리를 듣고 해석하는 것은 앞으로도 수많은 시대에 살 수많은 카프카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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