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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이 되어 적벽에서 춤을 추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하던 한나라 말 무렵.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획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功) 전술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대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 전술로 조조군에게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막는 것은…

 

나는 이 작품을 이전에 무료 실황 중계로 먼저 접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적벽>만의 큰 스케일과 무게감 있는 군무의 향연에 크게 놀랐다. 내 어깨너비 조금 안 되는 전자기기 모니터 화면으로 처음 마주한 <적벽>은 부재한 현장감을 메울 만큼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그렇게 나는 며칠 전,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과 중계로 봤을 때의 감정만 안고 <적벽>의 실제 공연을 보러 국립정동극장으로 향했다.

 

붉은 벽돌이 극장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국립정동극장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늘 그 기품과 위엄을 잃지 않는다.

 

극장 안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이 공연장과 <적벽>이라는 공연이 참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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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워 보이면서도 적벽만의 감각을 잃지 않는 무대 디자인이 극장에 들어선 나의 시선을 먼저 사로잡았다.

 

올곧은 직선으로만 구성된 무대 세트는 그 안에서의 미세한 불균형을 유지하며 매력적인 비대칭을 가져다주었다. 붉은 직선의 레이저 조명이 무대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신명 나고 때로는 잔인하기도 한 부채의 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국의 역사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대 위 수많은 직선들은 부채과 배우들의 춤사위가 그려내는 곡선에 중화되었다. 특히 쉴틈없이 몰아치는 군무는 많은 인원의 각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가 공연 내내 반복되며 관객들로 하여금 시각적인 즐거움을 끊임없이 선사한다. 시각적 볼거리에는 적벽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색채도 한몫한다. 작품의 키 컬러라고 볼 수 있는 적색, 흰색, 흑색은 융합되는 듯 그 안에서 저들끼리 경계를 둔다. 이는 적벽 속 인물들 간의 관계성을 가시화한 색 배치라고도 볼 수 있다.


<적벽>은 풍성한 악기 사운드 또한 장점 중 하나이다. 판소리의 기본 요소인 북은 물론 피리, 대금. 아쟁과 같은 우리나라 전통 악기, 드럼, 키보드 건반과 같은 서양 악기가 한데 어우러져 적벽만의 신선한 음악적 조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라이브 밴드의 연주는 기존 판소리극의 음악적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대식 적벽대전을 음악적으로 풀어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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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이 특히 적벽가를 재해석한 작품 중 유독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캐릭터 중심이 아닌, 서사 중심의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유비, 관우, 조조, 장비, 제갈공명은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이들은 저마다 매력적인 특징을 지닌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절대 특정 인물을 조명하거나 캐릭터의 특징만을 부각하여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주연·조연·코러스를 넘나들며 모두가 소리꾼으로서 평등하게 노래한다.


뮤지컬 <적벽>은 중국사의 한 축을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적벽 대전을 판타지적으로 잘 풀어낸 훌륭한 수작이다. 중국사나 판소리 언어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무대 위 퍼포머들이 온몸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를 느끼면 누구나 충분히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공연을 다 관람한 후 밖으로 나오자 덕수궁 돌담길 옆으로 주황빛의 조명들이 일정한 간격을 맞춰 늘어져 있었다. 공연장 밖으로 나온 이들은 일제히 같은 돌담길 옆을 걸었다.

 

순간 저마다 공연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정을 흘려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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