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도, 판소리도, 나에겐 다소 낯설고 거리감이 있는 장르이다.
하물며 뮤지컬과의 결합이라니.
종종 <적벽>이 재밌다는 평을 듣긴 했으나, 과연 그 둘에 모두 관심 없는 내게도 재밌을까?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극이 시작되자 그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 무렵.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 전술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 전술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 막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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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와 같이 <적벽>은 다들 막연히 알고는 있지만 막상 낯선,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이를 배려하듯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위로 늘어뜨려진 대나무 발 위로, 삼국지의 초기 배경을 나레이션하듯 간략하게 설명한다. 또한 삼국지를 잘 모르더라도, 무대 양옆으로 설치된 화면을 통해 대사를 자막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어 유비, 관우, 장비가 나와 도원결의를 맺는다.
이번 시즌 공연에선 배우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공간감을 개선하기 위해, 갑옷의 형상화와 부분적 해체를 통한 디자인 요소를 추가했다고 한다.
이때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세분화된 디자인이 눈에 띄는데, 인내가 깊은 리더 격의 인물 유비는 긴 소매와 단정한 차림새. 의리가 강하고 유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관우는 단정하지만 시원하게 트인 민소매, 다혈질적이지만 의협심이 넘치는 장비는 어깨의 살짝 치솟은 듯한 장식이 눈에 띄었다.
이외에도 홀로 새하얀 의상으로 청렴한 성정을 강조한 제갈공명, 적색과 흑색의 화려한 배합으로 야망가의 면모를 보여준 조조의 의상 역시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백, 적, 흑 셋의 간결한 색 배합으로 관객들이 쉽게 인물들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한나라의 주요 인물들은 백색과 흑색으로만 구성된 의상을 입고 있으며, 촉나라의 주요 인물들은 적색이 강조되는 의상을 입고 있다. 이렇게 경제적인 구성과 색 조합을 통해 전통의 간결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였다.
소품으로 활용한 부채 역시 매우 경제적으로 쓰였다. 한나라와 촉나라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 작중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칼이나 부채, 화살, 때론 고삐가 되기도 하였다. 소품 하나로 이런 다양한 연출을 맛볼 수 있는 것이 뮤지컬과 연극만의 맛이지 않나, 싶다.
또한 징, 거문고, 전통 관악기와 결합한 밴드 세션은 무대 아래에서 그대로 드러나며,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을 관객들에게 여실히 전달한다. 세션이 무대 위로 드러나있는 뮤지컬은 종종 보았지만, 전통 악기와 결합한 것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심지어 세션의 연주자들까지 종종 단역으로 참여하며, 제4의 벽의 경계를 살짝 건드리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판소리는 평소에 쉽게 접하기 정말 어려운 전통 문화인데, <적벽>을 통해 판소리라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 또한 느낄 수 있어 신선했다.
판소리의 특성을 살려, 소리꾼으로 창가를 이끌어가는 배우 한 명을 두고, 나머지 배우들은 고수로서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극을 진행시키는 방식이었다.
중간중간 관객의 반응을 살피며 이어지는 애드리브도 즉흥성을 띈 판소리의 특성과 맞닿아 있는 바 있다.
군사 점고를 하는 장면에서는 발랄하고 흥이 나는가 하면은, 애달프고 슬픈 창가도 있었다. 희로애락의 종합예술답게, 각 장면마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였다.
내가 여태까지 보았던 뮤지컬은 현대극이나 적어도 근대기 정도의 시대극, 서양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넘버 또한 클래식 음악이나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한, 멜로디와 코드 중심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적벽>은 판소리를 기반으로 했기에 장단이나 말맛, 감정을 중점으로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보는 내내 신선한 충격을 계속해 선사했다.
또한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는 판소리의 특성처럼, <적벽> 역시 젠더 프리 캐스트로 공연되었다. 조조 역에는 이승희, 추현종. 유비에는 정지혜, 이건희. 공명 역에는 임지수, 자룡 역에는 김하연 등.
원 <삼국지>에서는 당연히 남성으로 등장한 인물들이, <적벽>의 젠더 프리 캐스트를 통해 다양한 면면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성별을 초월한 연기라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 여성 국극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정말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판소리와 삼국지의 결합 때문인지, 극장에는 관객의 연령층 또한 유달리 다양하였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러 가게 되면 일명 '시체관극' 문화라 불릴 정도로 극한의 에티켓을 지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데, <적벽>은 전통과 현대가 혼용된 극이라 그런지 한결 편안한 분위기였다.
전통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는가, 는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남긴다. 어떻게 해야 좀 더 편하게 대중들에게 접근하면서, 또 어떻게 해야 그 전통의 고유함을 살릴 수 있을지.
어려운 길이다. 까딱하면 어설픈 퓨전으로만 남을 수도 있고, 너무 전통만을 고수하면 딱딱하고 고루하게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벽>은 그러한 고민에 더 큰 가능성의 저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올해 <적벽>은 국립정동극장에서 3월 13일부터 4월 20일까지 공연한다.
판소리나 뮤지컬, 삼국지. 셋 중 하나에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후회 없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