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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2년의 사회상과 드라마 <질투>의 의미


 

먼저 <질투>가 방영된 1992년이라는 시점을 떠올리면,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가 지닌 ‘아날로그적’ 특성이 눈에 띈다. 스마트폰이나 개인용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므로, 극 중 인물들이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하는 통신 수단은 주로 집 전화나 공중전화다. 이로 인해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대화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고, 오해나 우연성이 잦게 발생한다. 가족이 집 전화를 통해 자녀의 친구와 직접 통화하거나 공중전화 부스에서 옆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는 풍경은, 21세기에는 매우 낯설게 느껴질 만한 장면들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들이 1990년대 초반의 ‘평범한’ 생활상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개인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지금보다 훨씬 희미했음을 의미한다. 집이라는 사적 공간조차 쉽게 외부인과 공유되는 ‘열림’ 상태가 무의식적으로 유지되는 모습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새삼스럽게도 ‘가정이 이렇게나 개방적이었나?’라는 인상을 준다.

 

특히 <질투>에 등장하는 중산층(혹은 중간보다 약간 위) 가정의 모습은 IMF 외환위기(1997) 이전 한국 사회가 누리던 경제적 낙관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주인공 ‘하경’이 취업을 서둘러도 크게 막히지 않고, 고등학교 시절 해외 체류 경험을 자연스럽게 언급하거나, 아파트 생활이 크게 특별하게 그려지지 않는 등 여러 장면 속에 ‘풍족함’ 혹은 ‘여유’의 기류가 녹아 있다. 반면에 아직 1992년 당시만 해도 남녀평등 의식이나 젠더 감수성의 측면에서 지금과는 꽤 다른 사회 구조가 존재했음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하경’의 친구인 ‘채리’가 결혼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취업보다는 여러 차례 선을 보는 모습, 직업 활동보다 안정적인 가정(또는 배우자)을 우선 고려하는 양상이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그와 동시에 ‘하경’의 어머니인 ‘성희’처럼 이혼한 남편의 퇴직금이나 생활비에 연연해 하지 않고 별개로 자립적으로 살거나 작가로 활동하며 방을 따로 쓸 수 있는 비전통적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질투>는 1990년대 초반이라는 격변기에 나타난 다양한 여성상을 한 화면 안에 담음으로써, 한국 사회가 어떻게 전통적 가정관과 새로운 시대적 변화 사이에서 길항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런가 하면, <질투>는 등장인물 간 대화에서 상대 외모를 평가하며 ‘얼평(얼굴 평가)’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장면도 적지 않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평가가 명확히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분류되지 않았을 수 있으나, 30여 년이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상당히 불편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드라마가 과거의 언어·행동 양식을 과장 없이 보여주는 매체이기에, 당대의 가치를 현재와 비교·분석할 좋은 자료임을 시사한다. 즉, <질투>가 오늘날의 시청자에게 제공하는 의의는 단순히 ‘연애담’이라는 오락적 측면을 넘어, 당대의 사적·공적 관계 맺기, 성별 고정관념, 경제적 배경,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경계 등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드라마적 대본’이라는 형태로 기록·보존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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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편견과 <질투>의 가치


 

이처럼 <질투>가 담아내는 사회상은 흥미로운 동시에, 이 작품이 속한 ‘트렌디 드라마’라는 장르가 오랜 기간 지닌 편견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장르는 대체로 깊은 내용은 없고 ‘젊고 감각적인 세대’를 타깃으로 ‘소비지향’적이며 ‘화려한 영상미와 경쾌한 사운드’만으로 즐거움만을 강조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트렌디 드라마가 바로 그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했기에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관점 또한 존재했다.¹


그렇지만 트렌디 드라마가 오직 화려한 비주얼과 음악에만 기대어 있었다면, 한때 1990년대를 풍미했던 장르로 되짚어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측면에서 <질투>가 특별하고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질투>는 젊은 남녀의 연애담이라는 소재를 주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년 여성 작가가 자신의 창작 과정을 극 중에서 직접 펼쳐 보이는 이중적 서사 장치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즉, 극 속 인물들의 연애 스토리 뒤편에는 ‘드라마의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메타적 요소가 심어져 있고, 그것이 묘하게 결합되어 작품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² 이는 “트렌디 드라마 = 비어 있는 텍스트”라는 단편적 결론으로 마무리되기엔 충분치 않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1990년대에 방영된 많은 트렌디 드라마는, 초창기 연속극 중심의 방송 편성에서 과감히 벗어나 8부작, 16부작 등 미니시리즈의 형식을 선보이며 ‘빠른 전개, 세련된 영상미, 차별화된 캐릭터성’ 등을 무기로 시청층을 확대해 갔다. 이는 배우들의 단순히 화려한 옷차림이나 뮤직비디오 같은 음악적 영상미만을 좇았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장르를 어떻게 ‘짧고 굵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창작자들의 실험 정신이 깔려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³ <질투>가 거둔 성공은, 바로 이러한 시청각적 쾌감과 서사적 치밀함이 반드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 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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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렌디 드라마가 담아낸 ‘복합성’과 사회적 맥락


 

트렌디 드라마가 지닌 사회적·문화적 함의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과거 TV 드라마가 전업주부나 여성 시청자를 주요 타깃으로 삼은 전략이 유효했을 때, 그 여성들은 실은 단순히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작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표출하고 열띤 담론을 생성하는 ‘적극적 문화 주체’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질투>가 당시 시청률 50퍼센트를 넘기면서 폭넓은 시청자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마냥 화려하거나 달달한 연애담만을 선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 시대를 반영하고 그들이 갖는 고민을 드라마적 서사로 변주’했기 때문이다. 즉, 트렌디 드라마는 오락적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의 생활상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때로는 사회적, 경제적, 젠더적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환기해 온 장르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가 <질투> 속 ‘하경’과 ‘채리’의 대비다. ‘하경’은 졸업을 앞두고 빠르게 취업을 준비하며, 동시에 엄마와 함께 가사 운영에 참여한다. 이는 당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사와 직업’의 이중 부담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도 사회 참여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채리’는 결혼을 통한 안정적 삶을 이상향으로 삼아, 여러 차례 선을 보고 가정 주부가 되는 쪽을 더 선호하는 듯이 그려진다. 이렇게 두 캐릭터가 한 드라마 안에서 공존함으로써, 199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가정 중심적 여성상’과 ‘자립적 여성상’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중년 여성 작가인 ‘하경’의 어머니 ‘성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수 있는 ‘예술가적 정체성’과 ‘비전통적 생활방식’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사회적 편견이나 제약을 쉽사리 뛰어넘지 못하고, 때로는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어 난처함을 겪거나 택시를 잡는 것조차 고난으로 그려지는 장면은, 199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이 여전히 맞닥뜨려야 했던 장벽을 그대로 반영한다. 결국 <질투>라는 트렌디 드라마는 가볍고 경쾌한 청춘 로맨스의 틀 속에, 당대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열림과 제약’이라는 양면성 안에 배치함으로써, 그 시대를 보다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질투>가 지닌 ‘텍스트적 의미’와 ‘사회적 맥락’은 단순한 연애극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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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음말


 

결국 드라마 <질투>는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생생히 보여 주는 ‘창구’이자, 트렌디 드라마가 꼭 ‘속 빈 강정’만은 아님을 상징적으로 입증하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1992년이라는, IMF 이전의 낙관이 충만하면서도 젠더 평등 측면에서는 아직 제약이 존재했던 시기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중산층 가정의 일상과 당대 여성들이 처한 이중적 위치를 사실감 있게 포착함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얽혀 있던 사적·공적 경계, 가족의 개념, 여성의 사회 진출 방식 등을 드라마적 어법으로 잘 보여 준다.

 

아울러 <질투>가 ‘젊은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경쾌하게 다루면서도, 그 이면에는 ‘드라마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당대 사람들이 왜 이 작품을 열렬히 소비했는가?’라는 메타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는 트렌디 드라마가 수용자들에게 시청각적 쾌락만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자체의 창작 과정을 문제화하고 거울에 비추듯 보여 줌으로써 훨씬 넓은 차원의 서사적 층위를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여러 학자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해 넷플릭스나 OTT 플랫폼에서 조명되는 한국 드라마들의 예술적·사회적 가치를 거의 실시간으로 평단에 제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0년대 초반 ‘트렌디 드라마’가 보였던 실험과 잠재력을 다시금 살피는 일은, 우리 드라마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뿐 아니라, 대중적 문화가 가진 힘을 좀 더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질투>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단지 추억의 옛 로맨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을 충실히 구현함과 동시에 ‘가벼운 장르’라는 오해 속에서도 독창적 서사와 창작 과정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한 시대의 거울’이자 ‘트렌디 드라마의 잠재력을 보여 준 하나의 실험’으로서 가치가 있다.

 

앞으로도 <질투> 같은 트렌디 드라마에 내재된 다양한 의미 층을 탐색하려면, 단순히 ‘세련된 음악, 배경, 청춘의 사랑 이야기’만을 보는 것을 넘어, 그러한 시청각적 장치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당대 현실의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변주하며, 젠더와 계층, 사회적 구조 등은 작품 속에서 어떤 식으로 형상화되는지를 꼼꼼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질투>는 1990년대 초라는 특정 시대의 산물이지만, 트렌디 드라마 전반에 대한 편견을 거두어내고 그 가치를 재평가할 만한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1992년 당시의 아날로그적 일상, 경제적 낙관, 여성 역할에 대한 이중적 관점이 생생히 녹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사적·메타적 실험을 통해 트렌디 드라마 장르가 단순한 ‘감각적 텍스트’만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 안에 담긴 역사·문화·정체성의 결을 파악하려는 시선이야말로, <질투>와 같은 드라마 텍스트를 풍성하게 이해하고 연구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¹ 황인성. (1999). ‘트렌디 드라마’의 서사구조적 특징과 텍스트의 즐거움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언론학보, 43(5), 221-248.

² 임미주. (2023). 1990년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천과 <질투>(MBC, 1992)의 위상. 드라마연구,(69), 141-172.

³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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