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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들에게 오직 음료 한 잔의 값만을 지불하며 청춘의 휴식을 빚졌다.

 

가진 것 없는 소년의 육체는 어디에서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언제나 소년에게 다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이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아스팔트 위로 뛰쳐나왔을 때, 교복 소매는 계속해서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등 위를 스치고 있었고, 낡은 슬리퍼는 밑창이 다 닳아 있었다. 숨 가쁘게 세상을 헤매던 어느 순간, 소년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휩쓸렸고, 미로와도 같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속에서 굽이진 골목 사이를 서성였다. 그러다 다리로 밀려오는 통증에 더 이상 헤매지도 못하고 그저 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무겁게 짊어졌던 가방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던 곳에서는 항상 짙은 원두 향과, 알 수 없는 기계음이 가득했다.

 

교복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은 도망치는 방법은 그보다 더 다양하다는 것도. 원두 향 대신 알코올 향을, 버터 냄새 대신 자극적인 향신료 냄새를 찾을 수 있게 된 순간, 더 이상 나에게 카페는 피신처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쩌면 이제 카페에 갈 일은 없겠구나 생각한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어떠한 관계의 끝이 무조건적인 이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소년과 카페는 오히려 사슴과 나무꾼의 역할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수 년이 지나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소년의 세상은 청년이 된 후 수 십 배는 더 넓어졌다. 이동한 거리도, 함께 하는 사람도 다채로워진 순간 속에서 청년은 수도 없이 많은 카페를 돌아다녔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혹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그런 나날 속에서 문득 청년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아도 되는 본인에게 카페란 이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청년은 자신의 질문에 한참을 말을 고르며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금 입을 다물고, 커피 한 모금을 홀짝였다.

 

청년은 현재 인터뷰를 하는 일을 한다. 수도 없이 많은 인터뷰이를 만나기 위해 자연스럽게 카페를 향했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에 카페의 개수는 10만 개를, 카페 종사자는 27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길을 걷다 보면 같은 골목에서 카페 서너 개를 마주하는 것은 이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카페의 나라에 익숙해진 청년에게 카페의 소중함은 금세 희미해졌다. 오히려 그 무게는 주체할 수없이 가벼워져, 청년은 소년 시절을 망각함과 동시에 함께 카페에서의 즐거움을 잊어버렸다. 작은 스콘 하나를 입에 물었을 때 바삭거리는 겉면과 부드럽게 입안에 바스러졌던 조각들, 그리고 그것의 맛을 음미하다가 목이 막히는 순간 한 입 마셨던 아메리카노의 깔끔함, 그 순간 눈앞에 펼쳐졌던 그 공간만의 분위기. 모든 것은 청년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카페는 뻔하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뻔하게 꾸민 공간에서, 뻔한 커피를 판다. 그곳에서 청년은 뻔하게 사진을 찍고, 뻔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 당시의 청년에게 ‘카페’의 존재 의의에 대해 묻는다면, ‘뻔한 것을 하기 위해 기꺼이 뻔하게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청년은 100명에 가까운 인터뷰를 하고, 100개 넘는 카페를 돌아다니다가 문득 자신의 마음속 모순을 인지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당연하게도 카페는 모두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100개가 넘는 카페를 돌아다녔는데, 정말 그 모든 카페가 유사했고, 각각의 의미는 전혀 없었는지. 100개의 카페를 다녔는데 그 수많은 카페에서 얻은 결론은 오직 '뻔하다' 뿐이었는지.

 

그 순간 청년은 한 평의 좁은 공간에서 백 평이 넘었던 가지각색의 카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카페의 잔상들이 '뻔하다'는 편견에 균열을 일으켰을 때, 청년은 소년 시절의 자신이 지었던 빚의 무게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굳세게 닫혀있었던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시 한번 카페를 살펴보자고. 그리고 그 순간을 기록해 보자고.


 

이 글은 일을 하며 수많은 카페를 방랑하는 청년이,

수많은 커피를 마시며 10만 개의 카페들 중 단 하나만이 선사할 수 있는 순간들을 적어내리는 카페 관찰 일지다.

아주 사적이면서도 솔직한 표현과 함께,

소년 시절 지었던 빚을 상환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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