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엔 가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건넨 친절한 미소에 상대방이 마주 활짝 웃어줄지 무표정으로 지나칠지 알 수 없는, 꽤나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다. 무수한 삶만큼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서있는 곳도 다른 각자의 세상. 그 안에서 무언가를 미워하고 증오하긴 쉬워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건 참 어렵다. 그렇기에 다정한 사람이란 곧 용기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다정하기 위해서 ‘가끔’이 아닌 ‘모든 순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라면 어떨까?
다정함 한 번에 목숨을 걸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라면?
2017년 작품 <윈더>의 스핀오프작인 <화이트 버드>는 전작에서 어기를 괴롭히던 줄리안이 전학을 가며 시작된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손자 줄리안에게 할머니 사라는 오래전 본인이 손자와 비슷한 나이였을 당시의 이야기를 해 준다. 그것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사라가 마음 속에 간직해온 하얀 새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녀를 구원한 ‘다정함’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은 과거로 돌아간다. 194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평범한 어린 소녀인 사라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외과 의사인 아버지와 수학 교수인 어머니를 둔 덕에 부족함 없이 살아온 그녀에겐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다.
명랑하고 평범한 사라의 꿈은 그러나 나치의 그늘이 드리우며 산산조각이 난다. 한 손엔 유대인 명단을, 또 다른 손엔 칼을 차고 무자비하게 어린 학생들을 잡아가는 군인들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던 사라에게 손을 내민건, 그녀만큼 어렸던 소년 ‘줄리안’이었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탓에 한쪽 발을 저는 줄리안은 또래 남자애들에겐 무시와 놀림의 대상이다. 사라 또한 4년간 옆자리에 앉은 짝꿍인 그의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으나,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가 내민 손을 잡게 된다. 그 후로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라는 줄리안네 집 헛간에 숨어서 지낸다.
우린 인간이 볼 수 있는 증오의 끝을 보았고다정함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어두운 세상에선 그런 작은 것들이우릴 인간답게 해 준단다.- 영화 '화이트 버드' 중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정함을 베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에서, 다정할 용기를 낸 사람들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유대인 뿐만 아나라 그들을 숨겨준 사람들도 끌려가 총살을 당하던 시대다. 사라만큼 어린 소년이었던 줄리안과, 사라를 끝까지 숨겨준 줄리안의 부모님, 그리고 그 시절 용기를 낸 모든 사람들까지. 나도 별 수 없다는 깨달음이 결국 우리를 절망시키고 또다시 구원하는 ‘인간다움’의 지점이 된다면, 근본적인 인간다움엔 결국 사랑이 있는 건 아닐까. 다정함이 있는건 아닐까.
밖의 세상이 참담하고 어려워질수록 순수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줄리안은 그녀를 위해 학교에서 배운 진도만큼 과외를 해 주고, 그림을 그릴 도구를 가져다준다. 줄리안의 부모님은 부족함 없이 음식과 옷을 가져다주며 사라를 보살핀다. 둘만의 자동차 극장, 상상의 세계에서 줄리안과 사라는 세상 곳곳을 함께 여행한다. 비록 현실은 헛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새장 속에 갇힌 신세이지만, 상상의 세계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에든 갈 수 있었으므로. 같이 학교에 다닐땐 서로 말 한마디 안하는 사이였던 둘은 더욱 가까워지고, 다정함에서 비롯된 친절함과 따뜻함은 잔잔한 사랑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평범하지만 그만큼 위대한 ‘다정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홀로코스트의 참상과 아픔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삶, 희망, 피어나는 새싹, 하늘을 날아가는 자유로운 하얀 새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딱 사랑만큼의 이별이 있다고 해도, 영원한 건 결국 없다고 해도. 그저 하릴없이 영원을 믿게 되는 찬란한 순간은 존재하는 법이다. 기적과도 같은 다정함이란, 사랑이란, 인생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닐까.
한 소년의 용기 있는 다정함은 누군가의 세상을 바꿨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곧 알게 된다. 다정함 위에 새롭게 쌓아올린 세상 속에서 영원히, 그 다정함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린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잊지만,영원히 다정함을 잊지 못해.마치 사랑처럼.- 영화 '화이트 버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