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선, 완벽한 악
예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왔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으로는 영장류(靈長類)의 인간 과(hominidae)에 속하는 동물이고,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후세대로 지식을 전하는 능력이 있다는 고등 생물이라는 점이 있다. 이것은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기초적인 설명이자 모든 인간에 해당하는 정의(定義)다.
그러나 기어코 합치되지 못한 정의가 있으니, 바로 도덕적 인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에 질문하는 가장 친숙한 담론은 그 이름도 유명한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이다.
고대의 두 학자는 인간과 도덕이라는 문제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내놓았다. 먼저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는데, 그는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선하며 다만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은 인간 바깥의 존재에 유혹되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에 반해 인간이 선천적인 도덕성을 품는다는 주장을 부정하며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앞세웠는데, 인간의 선천적 성(性)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후천적 노력을 꾸준히 하여 선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두 학자의 주장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누구나 읽어보았을 만큼 유명하지만, 후대의 인간들마저 결론짓지 못한 난제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러한 의문 속에 자라나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의 담론에 의심을 던지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과연 선과 악이라는 양극단 중 하나로 정의할 수 있을까? 선이 바다라면 악은 하늘이고, 0이 선이라면 100이 악일 텐데 동시에 그들은 반절로 구분될 수도 있는 것일까? 그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을까? 우리가 스스로를 이렇게나 간결하게 속단할 수 있을까?
대위 게르트 비즐러의, 타인의 삶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줄 영화를 소개하기 앞서,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생각해보자. 지금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국민 모두가 일심전력(專心專力)하는 냉전 시기. 정부의 감시망에 누군가가 걸려들었으니, 건너 건너 들어본 것 같은 유명인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정부는 그가 체제를 분란시키고 적의 편에 투신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당신은 비밀 요원으로서 국가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인물을 감시하고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부의 권력자들은 당신에게 잠재적 반동분자를 감시하고 체제 이탈의 낌새가 보일 즉시 잡아들일 수 있도록 지시한다. 한순간에 당신은 타깃의 ‘친밀한 적’이 되었다. 이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의 내밀한 침실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도청해야만 한다. 그러나 명령이 부당하다며 불복하고 임무를 저버릴 시 당신에게도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기까지는 그리 머지 않다. 이후 당신의 안위 또한 보장할 수 없다.
집단은 명령하였고, 개인은 명을 받으러 나선다. 이제 당신에게 묻는다. 거대한 체제와 절대적인 권력의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는가?
역사상으로도 그러한 시대가 존재했다. 모두가 체제의 충실한 당원이자, 서로의 친밀한 감시자이던 시절이. 20세기 중후반,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 진영 간의 갈등이 팽팽히 이어지던 시기, 사회주의 동독에서도 서슬 퍼런 감시의 시선이 사방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국가의 발전을 통해 냉전 갈등에서 분명한 입지를 다지고자 했던 동독은 국경 바깥의 적대 국가와 더불어 국가 내부에서 체제에 혼란을 야기하는 인물을 가려내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동독 주민 15만 명을 대상으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총체적 감시를 시행하였다. 이때 국가보안부, 약칭 슈타지Stasi의 비밀경찰들이 군기를 잡았다. 그들은 주민들을 향해 비밀스러운 감시, 도청, 미행을 실시했고 그 결과 공산주의나 독재 정권에 반기를 드는 인물을 정치범으로 취급하여 납치, 고문하는 적대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사회적인 분위기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에 못 이겨 수많은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러시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동독 체제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여기서 정부가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부드러운 박해’다. 납치와 고문과 같은 직접적인 위협 대신 의도적인 승진 누락, 해고 등이 반동분자의 뒤를 쫓았다. 더불어 정권의 감시 또한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슈타지는 우편과 연락을 감청하였고 심지어는 타깃의 이웃, 친구, 가족까지 비밀 요원으로 포섭하여 사랑하는 이를 감시하게끔 만들어 개개인을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에 한 남자가 살았다. 그의 이름은 게르트 비즐러. 그는 앞서 당신과 같은 질문의 심판대에 놓였다. "국가는 위기에 처했다. 집단의 존속을 방해하는 적의 몰락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서독 및 자본주의 진영에 몸과 마음을 의탁하는 조국의 배신자들을 솎아내어 우리의 존속에 기여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하겠는가?" 사회주의 동독이라는 번듯한 국가 체제, 이탈을 허가하지 않는 강압과 통제 속에서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국 앞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게르트 비즐러 대위라는 직함 아래, 그는 국가에 자신을 투신했다. 국가는 비밀경찰로서 타깃의 집에 도청 장치를 달아 그의 일상을 낱낱이 도청할 것을 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르트 비즐러 대위는 상부의 명령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우리의 앞에 섰다.
대위에게는 오직 하나의 정의만이 존재한다. “상대는 사회주의의 적이다.” 냉담한 대위의 음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냉담한 시선으로 예비 경찰들을 훑는 대위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기준만이 존재한다. “그가 국가 체제의 존속을 위협하는가?(혹은 위협할 만한 가능성을 지녔는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오직 “Ja(그렇다)”, 또는 “Nein(아니다)”라는 대답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즉시 보고하고 잡아들여 사회로부터 격리할 것, 후자는 잠자코 지켜볼 것. 이후 처분은 간단하다.
이러한 결정에 번복은 없다. 누군가가 동독 사회의 안정적인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임을 감지한 순간부터 그는 대위의 적이고, 조국의 배신자이며 음침한 범죄자이다. 그것 이외 모든 것은 상관이 없다. 체제의 규범 바깥에 있는 것은 불필요한 낭만이고 쓰잘데기 없는 감상(感傷)일 뿐이다. 인간적인 동정, 공감, 사랑 따위는 동독 체제하의 개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적어도 대위에게는 그러했다.
비즐러 대위는 조직의 임무를 빈틈없이 해내었고, 꽤나 신임받는 요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만족했다. 타인을 의심하고 인간을 불신하며 사랑과 애정을 분열시키는 대위의 역할만이 조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자, 자신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였기 때문이다.
모나고 따스한, 인간의 삶
수많은 비밀 요원의 수고로 우뚝 자리매김한 동독 체제는 그 위양만큼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 하늘은 금세 고요로 뒤덮였다. 모두가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 세상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차분히 가라앉은 대지 위로 사회주의 동독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가고 있었다. 동독 주민의 정신과 육체를 한 방향으로 모아 이끌어, 마침내 우리 동독의 영광스러운 발전을 일구는 자취! 그것이 바로 대위를 비롯한 슈타지와 동독 정부의 염원이었다. 그들은 성공적인 여정 위에 있었다.
대위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고 이러한 판단에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결핍을 인지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대위에게는 오직 자신의 삶만이 존재했다. 다른 방식의 삶 따위는 알 수도 없었다. 집에서마저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음성은 없고, 아주 외로워지면 매춘부를 불러 잠시간의 온기만을 나누어 받는 삶. 대위는 자신에게 무엇이 결여되었는지 몰랐고, 이러한 삶 밖에는 살 수 없었다.
이러한 삶 속에서 대위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모든 인정(人情)을 불신하는 그에게는 무엇이 허락될 수 있을까. 타인의 일상을 도둑질하듯 훔쳐 듣고 고요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혼자가 되는, 이 서늘한 쳇바퀴 굴레에서 대위 게르트 비즐러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 * *
그의 무난한 일상에 어느 날 수상한 인물이 편입되었다. 대위의 상관이자 경찰 학교 동기인 국장 안톤 그루비츠의 연극 초대에 응한 날이었다. 대위와 그루비츠는 객석에 앉아 망원경으로 해당 연극의 작가 게오르크 드라이만을 관찰하고, 즉시 대위는 그가 의심스럽다 말한다. 더불어 문화부 장관 브루노 헴프 또한 같은 뜻을 보이자, 마침내 국장은 드라이만을 감시할 것을 명한다.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어 드라이만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는 도청 장치가 설치되고, 대위는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전선줄을 건너 두 예술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비즐러는 점점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즐러와 두 예술가 커플은 아주 다른 존재였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에게는 서로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꾸려낸 소중한 보금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예술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안전하고 무난한 삶, 그 이상의 인간다운 감정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대위 비즐러는 가질 수 없던 것이었고, 국가에 투신하는 대가로 인간 비즐러에게서 박탈되었던 무언가였다.
이따금 두 커플은 비즐러 대위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는데, 그건 바로 그들이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며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이성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가능케 했다. 심지어는 서로 간의 신뢰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겨도 말이다.
어느 날 크리스타가 혼자 밤거리를 걷고 있을 때, 오래도록 크리스타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문화부 장관 헴프가 찾아왔다. 그는 크리스타를 향해 더는 배우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협박을 들이밀며 관계를 요구하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 크리스타는 몸을 내주고 말았다. 한편, 두 인물의 집 앞을 감시하고 있던 비즐러는 헴프 장관의 차가 집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목격하곤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리려 전선을 교란시키고 드라이만의 아파트 현관에서 벨 소리가 울리게끔 만든다. 그것을 듣고 바깥으로 나온 드라이만은 낯선 차에서 크리스타가 내리고, “다음 주 목요일에 호텔로 오라”는 누군가의 음성까지 듣게 된다.
두 커플 사이에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이 놓였다.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타는 즉시 후회스러움에 무너져내리고, 드라이만도 괴로움에 둘러싸인다. 비즐러는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든 두 인물을 바라본다. 샤워를 마치고 기진맥진한 크리스타가 침대에 눕고, 그들 사이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드라이만은 대위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고통에 휩싸인 연인을 그러안는다. 자신을 배반한 연인에 대한 분노보다, 그녀의 혼란을 먼저 품어낸다. 그렇게 두 연인은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왔다. 외부의 교란과 현혹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랜 기간 함께하며 쌓아온 공감대만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이처럼 인간적인 그들은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고 충동적으로 행동했지만, 진정으로 따스했고 함께였다. 이것은 신뢰를 제1원칙으로 여기는 비즐러 대위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게르트 비즐러의, 선인의 삶
인간적인 삶의 바깥을 떠돌던 비즐러 대위에게 한 소식이 들어온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집에 놓인 전화기에 설치된 도청 장치를 통해서였다. 드라이만의 파티에도 초대되었던, 그의 스승 예르스카 감독이 동독의 사상 통제에 예술 활동을 저지당해 괴로워하다 끝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수화기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드라이만은 존경하는 스승이자 동료의 죽음에 괴로워한다. 전화를 끊고 슬픔에 잠긴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예르스카 감독이 선물한 악보
피아노의 선율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벽 속 설치된 도청 장치를 통해 대위에게 흐른다. 예르스카의 예술적 고뇌와 드라이만의 슬픔마저 아름다운 음률을 타고 비즐러의 귓가로 전해진다. 무표정한 대위의 표정 뒤로, 그의 주위를 둘러싼 잡다한 기계만큼이나 복잡하여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대위는, 비즐러는, 마침내 인간 게르트 비즐러는 그 가면 위로 무언의 슬픔 한 줄기를 흘려보냈다.
그것은 게르트 비즐러라는 한 인간이 느낀 첫 감정이었다.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주변인의 슬픔을 동정하는 마음. 인간 게르트 비즐러가 깨달은 첫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체제의 유지나 권력 다툼을 위한 부속품으로서의 대위에게, 자기 몫을 겨우 거머쥐던 삶에, 마침내 타인의 삶이 흘러들어왔다. 게르트 비즐러의 내면에 인간의 감정이 자랐다. 그 따스한 마음이 자리 잡았다. 그것은 눈물의 색만큼이나 진실된, 그의 것이었다.
* * *
그는 진정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비즐러는 더 이상 대위 비즐러가 아니었다. 다만 조금씩 자기 내면의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와 마주한 순간에, 혹은 헤드셋 너머로 누군가의 대화를 듣는 찰나에 태동했다. 권력가의 위협 앞에 크리스타가 고뇌하는 순간, 그리고 드라이만을 향해 위협의 손길이 뻗치는 순간, 비즐러는 인간 비즐러로서 행동했다. 이로 하여 그는 체제의 의심스러운 눈길 속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았고 마침내 옳은 일을 실천했다.
이러한 너그러움은 다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을 공유하는 상대는 더욱 넓어져, 그는 잠시 마주한 이방인의 실수도 보듬어준다. 그 일은 비즐러가 어느 어린아이와 잠시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순간의 일이다. 한 손에 공을 든 아이가 비즐러를 향해 “우리 아빠가 슈타지(비밀 경찰)들은 사람을 막 잡아가는 나쁜 사람이랬어요.”라 말하자, 그는 관성적으로 묻는다. “Wie heißt denn dein ... (너의 ... 는 뭐니)” 그러나 마침내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dein Ball. Wie heißt denn dein Ball? (너의 공 말이야. 너의 공 이름이 뭐니?)”라며 말을 돌리고 만다. 그가 자신의 물음이 연쇄적으로 불러올 사건이 그 아이와 가족의 일상에 불러올 위협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아이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평생 괴로워할 것을 배려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대위 비즐러가 거기에 서서 아이의 아버지 이름을 캐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대위 비즐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곳에는 평범한 인간, 게르트 비즐러가 있었다. 타인을 위하는 감정을 느끼는, 그리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 말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게르트 비즐러가 지향할 새로운 정의(正義)이자, 자신에게 붙인 첫 번째 정의(定義)가 되었다.
무용(無用)한 날갯짓도 아름답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갈피를 세운 게르트 비즐러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던 대위로서의 직함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내면을 두드리는 감정과 인간적인 마음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내면의 명령을 수행했다. 체제의 수족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한 인간으로서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체할 수 없다는, 그 비이성적인 충동에 패배했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비밀을 깨달은 드라이만에 의해 그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과거의 게르트 비즐러는 비밀 요원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협에 빠뜨렸고, 그 죄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으나, 단 한 사람만은 그의 죄를 사하였다. 그리고 게르트 비즐러는 완전한 타인 게오르크 드라이만에 의해 또 하나의 정의를 수여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인(善人)’이었다.
선인이란 무엇인가? 게르트 비즐러를 통해 영화는 이렇게 정의한다. 타인의 삶을 통해 연민, 공감, 동정 등의 감정을 느끼고, 이를 계기로 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대위 비즐러가 비로소 선인 게르트 비즐러가 될 수 있었듯,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로 선인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선을 일깨우는 계기, 바로 타인을 향한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안쓰러이 여기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여 눈물지을 때, 타인을 배려하고자 하는 선의 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를 돕기 위하여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일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마침내 선한 행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선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선인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영원히 완벽한 선인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유혹과 난관에 휩쓸리고, 때로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우선시하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선인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노력하는 선(善)이야말로 실수투성이의 일회성 삶을 사는 인간에게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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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기란 쉽다. 아름다운 사람과 그림, 음악이 모여 그야말로 황홀한 지상낙원이 되리란 기대는 불문의 진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그 무엇도 티끌 없이 아름다울 수 없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이따금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기꺼이 선한 행동을 하고, 끝끝내 더없는 영원을 좇는다. 그런 것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그 자체로는 완벽하지 못한, 그러나 그 불완전한 노력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