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그림이나 작가가 있는 이라면, 존경하는 작가의 그림들에 둘러싸여 잠드는 하루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블루 베이컨] 을 읽게 된 계기는 그러했다. 베이컨의 그림들에 둘러싸여 보내는 하루라니, (비록 그의 그림들은 조금 오싹하긴 하지만!) 나 역시도 기대감에 젖어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가인 야닉 에넬은 프랑스 퐁피두 미술 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전시회에서 홀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에게 (그리고 책을 읽는 내게도) 무척 흥미로운 제안이었지만, 정작 화이트 큐브에 갇힌 듯한 그는 한동안 괴로움에 젖어 그림을 볼 여유조차 찾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정신을 차린 후에는 어둠과 베이컨의 그림만으로 점철된 공간 안을 둘러보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베이컨의 대표적인 3부작 시리즈 등 감각적이고도 파격적인 베이컨의 작품들과 함께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한다.
[블루 베이컨]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생애와 야닉 에넬의 그림에 대한 해석과 내면으로의 성찰, 그리고 프렌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에 대한 시선적 움직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생애도, 그림이 가진 파괴적이지만 생동력 있는 특성도, 그림에 대한 성찰적이고도 자세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눈길이 갔던 것은 작중의 공간적 배경인 '화이트 큐브' 가 가진 힘이었다.
화이트 큐브란, 출입구 외에는 사방이 막혀있는 실내 공간을 의미한다.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으로, 우리는 그 곳에서 평범한 시민이 아닌 관객으로서 작품이 주는 세계에 온전히 빠질 수 있다. 출입구 외에는 사방이 막혀 있고, 작품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설계된 공간에서 우리는 온전히 작품에 몰입한다.
작중의 야닉 에넬 또한, 화이트 큐브에서 베이컨의 그림이 가진 매력과 그의 생애, 그리고 그림에 대한 본인의 생각의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출구 없는 공간에서 고통에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어떠한 공포를 느끼는 경험도 하지만 그 역시 화이트 큐브가 전해줄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의 일환처럼 여겨졌다. 정보의 파도 속에서 우리가 이토록 온전히 무언가에 몰입하고, 괴로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대한 일화가 함께 떠올랐다.
베이컨의 그림에 비하여 그림이 주는 느낌은 무척 다르지만, 화이트 큐브 속에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접하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위로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야닉 에넬, 그리고 나 또한 이렇듯 베이컨의 그림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그림이 주는 인상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다. 고통과 외로움, 해방감 같은 것들 말이다.
끝으로, "그림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랑처럼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인 것이다."라는 책 속의 말이 무척 와닿았다. 누군가는 이 말에 공감할 수도, 혹은 그림처럼 정적인 대상이 어디에 있다고? 하며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야닉 에넬의 시선을 따라 화이트 큐브 속을 유영하다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닿을지도 모른다.
파괴적이고도 강렬하다고만 느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주는, 삶 속에 묻어나는 감정들의 흐름에 대해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