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밤의 공원에서 - imagine [음악]

글 입력 2025.01.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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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으며 읽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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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도심 저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고, 주위가 몽롱하게 어둠에 잠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밤의 공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렀다. 오늘이 아니면 이곳을 다시 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여기를 올 수 없었다. 여기 혹은 이곳은 ‘그곳’이 될 것이고, 다시는 ‘이곳’이 되지 못한 채 영원히 ‘그곳’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회는 좀체 없다고 나는 출국장에서부터 생각했다. 대학생이 아니었다면, 여기를 이렇게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로부터 20여 일이 지나갔다. 20여 일 동안, 이런 기회는 삶에 좀처럼 없다는 실감은 강해져만 갔고, 좀처럼 없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생각도 무르익어 갔다.


오늘 우리는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다녔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더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인생처럼 여행도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마냥 아쉬워하며 보내면 안 된다. 계획이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면, 모퉁이를 돌아서 이어진 길을 가면 된다. 그렇게 기억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걸 남기면 된다. 아름다운 걸 좀 더 많이 보기 위해 이미 그날 낮을 다 써버렸지만, 그래서 진력이 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밤이 오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구글 지도를 보며 무작정 이 공원에서 제일 아름다울 만한 곳을 찾았다. 공원의 가운데, 지도만 보아도 그곳이 중심임을, 거기서 보는 공원의 풍경이 아름다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밤의 공원은 위험하다고 익히 들어왔지만, 이곳에 머문다기보다는 그저 지나갈 생각이었으므로,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갈림길을 걷다가 중앙로로 들어섰다. 공원에 잔디밭과 나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말끔하게 깔린 대로가 나왔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고 꽤 아름다웠다. 이대로 쭉 가다 보면 호수가 나타날 거였다. 우리는 그 호수를 빙 둘러보고 센트럴파크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코스는 순조로웠지만 밤의 공원엔 역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 모여서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혼자서 어슬렁거리며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낮이라면 공원을 즐기는 사람들로 보였을 테고, 나도 즐거운 얼굴로 그들을 보았겠지만, 햇살은 온데간데없고 무언가를 감추고 숨겨주는 어둠이 활보하는 시간에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어둠이 머릿속에도 침입하려는 듯했기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 가장 밝은 곳을 향해 걸었다.


한층 더 어둑해진 공원에 경계심을 세우며 걷다가 중앙로 끝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았을 땐, 밤에도 신기루가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계단이 지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원에 지하가 있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그 아래에 탁 트인 지하 공간이 보여 천천히 걸어갔다. 신기루에 이끌리듯이 그 지하로 걸어간 건, 그곳이 이 도시의 어느 가로등과도 비교가 안 되게 환하고 또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치 형태의 기둥이 늘어서 있었고, 벽마다 중세 르네상스 양식을 연상케 하는 패턴이 이어져 있었다. 여러 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뉜 천장에 은은한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공원에 지하가 있고, 지하가 그렇게 꾸며져 있다는 걸 알고 왔어도 아름다웠을 풍경. 우리는 애초에 상상해 본 적도 없었으므로, 잠시 넋이 나간 상태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은은하게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나를, 그리고 우리를 완전히 그 안으로 이끌었다.


한 연주자가 지하 광장 중앙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그는 뒷모습을 보이며 의자에 앉은 채로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에게는 기타 하나와 모금함, 악보가 놓인 보면대가 다였다. 몇몇 사람이 주위에 서서, 혹은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로 멜로디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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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 하지만 이런 편곡으로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듯한 멜로디였다. 가사 없이 멜로디만 흘러나와 오감 중 하나가 갑자기 닫혀버린 듯하면서도, 멜로디 자체에 사람이 태어나면서 닫혀버린 감각, 그래서 우리에겐 영원히 미지(未知)일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멜로디가 기적처럼 일깨운 미지를 경건하게 음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노래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imagine’이었다. 단순한 기타 선율이었지만, 한 줄 한 줄 튕길 때마다 광장을 타고 울리는 진동은 괜스레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고, 다음 줄이 튕겨질 때까지의 짧은 침묵은 주위에 서 있는 모두를, 부드럽게 침묵하게 만들었다. 미소 같은 침묵이었다.


‘상상해 보라’는 가사를 떠올리며 멜로디에 마음을 얹자, 멜로디는 내가 딛고 선 현실을 깨끗하게 지우고선 날 데리고 어딘가로 유유히 흘러갔다. 음은 날갯짓처럼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하며 얽혀있는 마음을 천천히 풀어갔다. 얽혀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마음을. 그때 몇 사람이 그 선율에 목소리를 얹었다. 그 멜로디에 더 없이 어울리는 깨끗한 목소리로, 턴테이블에 바늘을 얹듯, 가사를 얹었다.

 


You may say I'm a dreamer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말하겠죠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요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그리고 세상이 하나로 살아가기를


 

그러자 마음에 얽혀있던 것들이 한층 선명해지는 듯했고, 선명해짐과 동시에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 나는 살아 숨 쉬는 걸 잊은 채, 영혼의 호흡을 느꼈다.


연주가 끝나고 여름밤 공원의 소음이 귀에 들어오자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그토록 진심이었던 박수는 없었다. 박수를 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수많은 명곡이 있지만, 진정한 명곡은 그 곡이 연주되는 동안,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차차 그 한 곡이 완성 되어가는 동안, 듣는 사람에게 찰나 같으면서도 영원한 감정을 선사한 뒤 흔적 없이 떠나가는 노래라고. 그때의 이메진은 나에게 모든 걸 내어주었지만, 그랬다는 흔적 없이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오기 전과는, 이 지하로 내려가기 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감동적인 순간을 겪은 뒤로는 공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다. 조명 없는 깜깜한 길들과 숲,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벤치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이 많아 방향을 틀고 헤매고 헤맸다. 좀 전의 순간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섬뜩한 어둠. 그러나 그런 어둠에도 끝이 있었다. 지도가 가리키는 길을 믿고, 동시에 그 길을 가는 나를 믿고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 밖으로 이어지는 큰 도로 앞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말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보면서 더없이 상쾌하게 웃고 있었다.


 

 

에디터 안태준.jpg

 

 

[안태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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