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다운로드 (1).jpg

 


구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트렌스젠더 클럽에서 J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기가 피던 담배를 내 입술에 물렸다. 몇 시간 전, 연기가 메케해 싫다고 말한 것도 그는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독일인 특유의 오만한 행동은 마치 그가 나치의 후예라는 사실을 적시해주는 듯했다. 그러니 J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뚱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어설픈 춤사위를 보일 때, 또는 키스할 때 마주친 눈 밑의 옅은 주근깨가 보이는 찰나는 앳된 그의 얼굴을 한층 더 해사하게 만들었다. 큰 키와 여린 얼굴선, 햇빛에 부서지는 베이지색 머리칼, 그리고 갈색 눈동자와 하얗고 가느다란 몸을 보면,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한 번쯤은 다시 돌아봤을 전형적인 미소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때때로 나오는 샐쭉한 입술과 배시시 올라가는 눈꼬리에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여덟 명이 함께 투숙하는 J의 호스텔에서 첫 번째로 나눈 밤은 그저 아팠다. 긴 애무 없이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의 행동은 경이로울 만큼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곧 기대 어린 J의 눈망울에 부딪혀 굳어 있던 미간을 풀고, 성인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을 보고 익힌 야릇한 표정과 신음을 간간히 템포에 맞춰 내보냈다. 그렇게 다양한 자세로 행위는 꽤나 여러 번 이어졌다. 계속되는 키스와 반복되는 움직임에 목 안은 가물었다. 하노이의 밤공기보다 습하고 높은 J의 체온 때문에 내 등줄기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의 얼굴에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에, 삐걱거리는 비좁은 침대에서 시선을 돌려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암흑 같은 밤이 끝없이 이어졌다.

 

새벽 4시, 잠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정신으로 팬티를 찾아 헤맸다. 하노이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사파에서 보내기로 한 것도 잊고 있었다. 동틀 녘, 슬리핑 버스를 타기 위해 재빠르게 호스텔에서 빠져나와 짐을 챙기러 가야 했다. 몇 시간 자지 못해서인지, 클럽에서 마신 쓰디쓴 보드카의 숙취 때문인지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짙은 어둠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검은 팬티 때문에, 방 안을 감도는 에어컨의 설익은 소리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포기해 버릴까 싶었지만, 입고 있는 치마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힘들어 보였다. 곤히 자는 그를 밟지 않게 조심히 내려와 휴대폰의 플래시를 켜 침대 안쪽을 살폈다. 욕지거리를 뱉으며 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팬티를 꺼내 얼른 한쪽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 순간, 온갖 배낭여행자의 짐들로 가득한 바닥 위로 혈흔이 검붉은 원을 그리며 달라붙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지만, 나머지 다리도 들어 올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가방을 챙겼다. 택시를 부르기 위해 J를 흔들어 깨웠다. 순간 짜증과 피로가 부표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머릿속를 정리하기도 전에 택시가 잡혔다. 그의 입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서둘러 호스텔을 빠져나왔다. 밑은 불쾌하게 얼얼했고 새벽 공기는 푸르스름하고 끈적거렸다. 차창 밖 풍경은 눈앞을 스치듯이 흘러갔고, 온갖 사념들만이 빠르게 차올라 서로 뒤엉켰다. 고작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블루 하우스 호스텔에는 영영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오늘 좋았어요.’

 

슬리핑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후두부를 돌로 때려 맞은 듯한 아득한 기억 속, 그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나를 심연 속으로 끌어내렸다. 더 밑으로 추락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었다.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어 놓은 것이 문제였다. 도피가 계속되어야만 낭만 속 환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당장 다른 곳으로 또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수중에 남은 돈으로는 일주일을 버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망연자실한 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J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의식이 피어오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덟 살 차이 나는 형이 있었고, 검은 고양이 ‘그레고’를 키웠고, 또 무엇을 얘기했지? 으레 물어보던 앞으로의 여행 계획도 얘기했던 것 같다.

 

‘같이 여행 온 친구 이름이 뭐였죠?’

 

‘발음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냥 요크라고 불러요.’

 

‘요크라니, 특이하네요’

 

내게 처음 말을 건넨 J의 친구 이름을 말하자 장난스레 웃던 그의 얼굴이 선했다. 여전히 J가 무엇에 그리 재미있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오래된 친구의 짓궂은 별명이겠거니 생각했다. 요크셔테리어의 요크 같은 느낌인가. 아무래도 그 이름은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이 몸을 겹쳐도 그의 속은 알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 순간 G의 얼굴이 떠올랐다. 치망마이에 도착한지 이틀째가 되던 날이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