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좌절, 기쁨과 희망 내 마음속 아이
「마흔을 위한 치유의 미술관」은 1부(아무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날에)부터 4부(막연한 내일이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밤에)까지 챕터를 나누어 화가들의 이야기를 설명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몇 개의 작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에곤실레다. 에곤실레는 기괴하고 적나라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그가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매독에 걸렸고 14세에 정신착란, 환각 증상을 보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겪으며 공포에 휩싸였다. 어릴적 부정적인 경험을 치유하지 못해 내면에 상처받은 아이가 생긴 것이다. 실레는 나중에 가정을 꾸리지만 스페인독감에 걸린 아내는 임신 중 사망한다.
삶은 무균실이 아니라는 사실은 새삼 말할 것도 없는 진실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의 상처를 하나씩 늘려가는 일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는 남몰래 앓았던 상처와 슬픔, 좌절, 당혹감으로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는 어린아이를 하나씩 품고 산다.
- 113p
어릴 때 돌보지 못한 어떤 상처는 강박, 중독, 공허함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림으로 표출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 내게 글쓰기가 생각의 환기, 정화제가 되어주듯 미술이란 도구는 치유의 도구인 셈이다.
두 번째로 감명 깊게 본 작가는 세잔이다. 세잔은 화가로서 기교와 재능이 부족하다는 열등감과 동시에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었다. 당시 분위기는 역사화나 성화, 초상화가 환영을 받았는데 그는 전통적 관념을 고수했다. 남들이 아니라고 할 때 혼자 맞다고 자부하고 갈 수 있는 힘, 파리 미술계가 등졌지만 자신의 철학을 쌓아 올렸다.
한편으로는 그 용기가 부럽다. A가 맞을까 B가 맞을까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사회통념상으로는 A가 맞는데 나는 B를 택하고 싶을 때, 과연 갈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남들의 시선에 나를 맞추려고 했다. 집단생활을 할 때면 맞추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같은 시기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중 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떠난 후 정물화들의 가치가 알려진 게 안타깝지만 그림을 향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세 번째, 기억에 남는 작가는 그랜마 모지스다. 일흔여섯의 나이? 이게 된다고? 나이라는 편견을 깨트린 작가, 그랜마 모지스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는 76세 할머니 화가다. 화사한 색감, 아기자기한 장면을 묘사해 즐거움이 느껴진다. 순수한 아트풍의 그녀의 그림은 무명화가에서 국민화가 대열에 올라가게 해줬다. 그녀에게도 일찍이 상처의 순간들이 있었다. 남편과 사별했으며 열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다섯 명을 잃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갈 것인가이다.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결정권, 통제력은 젊음을 유지하고 노화를 예방하는 결정적인 심리적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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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가족을 잃어 힘들었지만 남은 가족과 손주들, 그림으로 남은 여생을 따뜻하게 보낸 그랜마 모지스.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랜마 모지스의 그림을 보며 나이가 들어도 마음먹고 도전하면 불가능한 건 없다는 희망회로가 생긴다.
치유의 미술관을 나오며
「마흔을 위한 치유의 미술관」은 말 그대로 미술 작품을 읽으며 심리학을 접하는 느낌이다. 작품 속 소개된 작가의 삶, 나, 윤현희 심리학자의 이야기 세 가지를 견주어 보고 다시 현재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상처와 결핍, 슬픔과 아픔 등 애써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내면아이도 깨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제일 좋은 치유는 스스로 깨닫는 거다. 저들도 이겨냈으니 나도 힘겨울지언정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권태로움, 무기력, 지친 마음들이여 안녕! 큰 소리로 단어를 읊으며 무거웠던 에너지들을 방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