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인공지능 로봇을 빚는 피그말리온 - 연극 '이야기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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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인간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모습과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답으로 이미 수많은 문화 콘텐츠들이 개발됐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인공인간'은 인간성을 재조명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탓에 기계보다는 인간에 가깝게 묘사되곤 한다.
오늘 소개할 연극 '이야기와 전설'에서는 기존 장르에서 기대되던 소재,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로봇' 혹은 '인간성을 깨우친 로봇'이라는 상상력을 덜어낸 작품이다. 놀라운 기술 덕택에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하지만,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만큼 자연스럽게 움직이거나 개성 있는 대답은 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회적인 행동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고 재현한 것으로, 움직임과 맥락에서는 인간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야기와 전설'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중심이 로봇이 아닌 인간에 있다는 점이다. 작중 교육용으로 제작된 로봇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냉혹한 기계도 아니지만, 인간과 똑같은 친구도 아니다. 다른 기술이 그러하듯, 기술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가 있다. 조엘 폼므라는 인공지능 전문가인 장-가브리엘 가나시아의 말을 인용하여 작품의 메시지를 제시한다.
로봇은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효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로봇은 기계 부품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로봇을 둘러싼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로봇을 이해해야 하며, 그 맥락이 바로 로봇에게 실질적인 존재를 부여하는 유일한요소입니다.
장-가브리엘 가나시아
작품은 인간과 유사한 로봇의 발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들을 청소년기와 엮어 11개의 장면으로 쪼개놓는다. 몇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나열하자면 이렇다.
첫째, 어린 소년 둘이 길거리의 소녀에게 치근덕거리며 그녀가 로봇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져보려고 한다. 둘째, 로봇 회사의 이사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로비의 기능을 소개한다. 로비는 인간과 똑같이 보이지만 어색한 목소리와 표정,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이사는 인간의 사회적 기능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셋째, 연인 사이의 소년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앞서 등장한 로비의 주인이다. 누군가 소녀와 로비의 관계를 묻자, 소녀는 로비가 로봇 이상이며 때로는 감정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한다. 소녀의 여동생이 나타나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소년이 실망해서 떠나자 소녀는 로비에게 기대며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넷째, '로봇'으로 인해 세상이 여성화되는 것에 실망한 마초 교육프로그램이 유행 중이다. 자연과 남성성을 강조하는 교관은 어린 소년들을 '진짜 남성'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 중 한 소년은 다른 남자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아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교관은 왼쪽을 여성자리, 오른쪽을 남성 자리로 두고 각자 어느 위치에 서라고 말한다. 소년은 중간에 가깝게 서고, 나머지 소년들은 오른쪽 자리에 있는 의자에 서로 앉으려고 아웅다웅한다. 화가 난 교관은 교관과 소년들은 자신들이 그를 구해주겠다고 하면서 소년을 똑같은 괴롭힘 상황에 몰아넣는다. 불이 꺼졌다가 켜지고, 소년은 '여자'자리에 도망가 앉는다.
다섯째, 로봇 판매점이 배경이다. 로봇으로 인해 직장을 잃은 남자는 자신을 자른 직장상사를 기다리기 위해 매장의 대기실에 앉아있는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로봇이 마치 노는 것처럼 있게 되면 보고 신문을 본다. 남자는 그들과 있게 되면 나온 테니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린다.
여섯째, 어머니의 시한부 선고로 가사 로봇이 필요해 로봇을 중고로 구매하는 상황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자리가 로봇으로 대체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가족들에게 로봇을 파는 소년은 로봇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로봇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것은 어른이 되는 것을 막는다고 믿는다는 부모님 때문에 팔아야하는 상황이다. 소년은 가족들의 사정을 듣는 한편 로봇의 기능을 성실히 설명한다. 새로운 가족은 로봇을 리셋하고 팔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소년은 조건을 받아들인다. 가족들이 나가자, 소년은 울먹이면서 로봇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로봇은 웃으면서 자신도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일곱번째, 어떤 기계실에서 고장 난 로봇과 소년이 있다. 로봇에서는 명백히 고장 난 소리와 움직임이 보인다. '장난감 총'을 경험한 로봇은 진짜 총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사람을 죽인다. 로봇은 고장 나고, 이제는 폐기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로봇이 폐기되기 전, 소년은 로봇을 안고 그가 자신의 가족이었음을 고백한다. 그와 가족이었던 소년은 로봇을 폐기하는 과정에 자신을 들여다 준 것에 감사한다.
여덟번째, 유명한 로봇 가수를 보면서 투병생활을 견뎌온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자신의 병이 나으면 가수의 공연을 쫓아다니리라 결심한다. 그의 생일을 맞아 그의 어머니가 로봇 회사와 연락하여 공연을 준비한다. 하지만 로봇 가수는 인기가 줄어들어 폐기될 예정이다. 그 사실을 모두에게 숨기고 로봇은 공연한다. 로봇은 자신이 모든 팬의 목소리, 얼굴, 메시지, 맥락을 기억한다고 이야기한다. 소년은 그에게 깊은 사랑을 고백하고, 그들만을 위한 공연이 이어진다.
내가 열거한 장면들에서 유추할 수 있듯, 연극에서 묘사되는 로봇의 '인간성'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공지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로봇은 첫 번째 장면에서 나온 추잡한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비극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교육적으로 활용되기 위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로봇이 상용화된 세상에서, 로봇의 등장으로 인간의 살을 만지려고 하고, 로봇과 정반대되는 자연과 남성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이미 돈이 인간성을 대체했을 때 파이터클럽과 같은 백일몽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지 않았는가?). 인간성을 긍정하는 과정에서 그 정반대에 있는 개인의 다양한 특질을 깔아뭉개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앞서 말한 예의 사람들은 로봇(혹은 로봇으로 표상된 수많은 좌절)을 완전히 자신으로부터 추방하고자 했지만,반대로 로봇을 삶의 중간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다. 여기서 작품이 로봇을 묘사하는 방식이 예술적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인간을 모방하기 위한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어 있다. 그래서 로봇은 그림을 그리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신 나게 춤을 추기도 한다. 이들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 따라 데이터를 쌓아가기 때문에 구매한 로봇들이 결코 같은 로봇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래서 인공 로봇을 온전한 기계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판매되고 폐기될 수 있으며, 사용자의 입맛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수도 있다. 본질에 초점을 두었을 때, 이들은 철저한 상품이다. 하지만 이들이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로봇을 둘러싼 인간들은 로봇의 행동에 위로받고, 빈자리를 채워줄 것이라고 믿고, 가정의 침입자로 생각하고, 가족이나 연인의 자리에 놓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로봇과 청소년기를 엮은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모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불안과 충동, 육체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낀다. 우리는 불안과 충동을 재료로 하나의 성격구조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많은 것을 이용한다. 가족, 친구, 낯선 사람, 문화, 우리는 수많은 것들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고 관계 맺는다. 나이가 들어도 이런 투사와 내사가 반복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행동이나 말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이 작품은 수많은 것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청소년기와 인간과 물체 사이에 있는 모호한 로봇을 엮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이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뒀다면, '이야기와 전설'은 로봇을 인간으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초점을 둔다.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기술의 축복을 받아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생생한 실체로 느낀다. 그 조각상이 어떤 존재로 만들어질 것인가는 결국 그것을 조각한 이의 마음에 달렸다.
'이야기와 전설'은 그 조각상을 어떻게 조각해야하는가, 혹은 살아난 조각상이 우리를 얼마나 혼을 빠지게 할 것인가, 그 조각상과 하는 교류가 얼마나 진실한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조각상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는 우리의 본능과 그 본능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상황들을 다양하게 비출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관점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관대한 시선 속에서 묘한 희망을 갖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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