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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2024년, 대중예술의 재정의②

 

 

전편에 이어 예술과 대중예술의 정의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한 뒤에, 앞으로 대중예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예술의 정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예술이란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이다. 일반적인 예술의 의미를포함하고 있는 이 사전적 정의를 조금씩 수정하면서 예술을 정의해 보려 한다.


최근에 와서는 먼저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이란 부분이 예술에 있어서 더 이상 필요한 부분이 아니게 되었다. 일례로 조셉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를 보면, 작가는 실물 의자와 그 의자의 실물 크기의 사진, 그리고 사전에서 찾은 ‘의자’의 정의가 설명문을 가져다 놓고 이를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는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을 써서 예술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의자의 진정한 본질은 어디 있는가’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을 예술이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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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직도 많은 예술 작품들이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술이란 어떤 것’이란 개념의 정의에서 지금 예술이라 불리고 있는 것들의 특성을 포함하지 못하면 이는 개념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이라는 부분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예술을 포함하기 위해 지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예술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한다는 구절은 현대 예술에서 보기 힘든 말이다. 이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예술 작품들이 꽤 존재하기 때문이다. 1967년 서울 북창동 중앙공보관에서 무동인과 신전동인이 진행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라는 행위예술을 예로 들 수 있다. 비닐우산을 들고 앉은 정강자 화가 주위를 여덟 명의 남성 작가와 한 명의 여성 작가가 촛불을 든 채로 ‘새야 시야 파랑새야’를 부르면서 빙빙 돈다. 그러고 나서 촛불을 끈 뒤 비닐우산을 뜯어내고 내동댕이 친 뒤 소리를 지르며 짓밟는다. 이런 퍼포먼스 아트가 과연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이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같은 특정 의도, 혹은 자신이 하고 있는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부분은 ‘창작자의 특정한 의도를 표현하려는’이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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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창작자의 특정한 의도를 표현하려는 것은 무엇이든 예술이라 불릴 수 있고 감상자가 그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는지는 상관이 없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작가의 의도를 감상자가 잘못 파악하는 경우, 또는 작가의 의도를 감상자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 작품은 예술이라 불릴 수 있나?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본 어떤 감상자가 이 해프닝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두 번째 경우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한 어떤 작품을 보고 감상자가 이 작품을 더럽고 저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 두가지 경우 두 상황 모두 여전히 그 작품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또한 두 경우와 같이 감상자가 창작자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감상자가 그렇게 감상한 것의 문제일 뿐 예술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인다. 따라서 예술은 감상자가 창작자의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는 부분에 대해 벤야민의 아우라를 위한 2가지 조건 중 하나를 이용해 보충하려 한다. 벤야민에 의하면 아우라는 두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나타나는데, 이는 작품의 진품성과 감상하는 사람이 일상을 떠나 예술작품에 침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 두 번째 전제조건은 감상자가 그저 일상적인 태도로 작품을 감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를 보면서 ‘배경에 있는 밭에는 어떤 작물이 자랄까?’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무관심성을 가지고 모나리자를 감상의 태도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즉 감상자는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태도로 바라봐야 하고, 동시에 예술 작품도 감상자 자신을 감상자로만 바라본다는 느낌을 감상자가 받았을 때, 즉 상호소통이 될 때 예술작품에 침잠이 일어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예술의 정의를 정리해 보자면, 예술이란 창작자의 특정 의도나 의미를 부여한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으로 그 목적성은 순수하게 감상의 대상만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의 대중예술은?


 

대중예술에 대한 필자의 가치 판단을 먼저 하자면 필자는 필자가 내린 대중예술의 정의를 바탕으로 중립적인 입장이다. 앞서 서술한 대중예술의 정의는 그 자체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 특성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일례로 대중매체를 통해 소비가 가능한 대중예술이란 정의에서 벤야민이 말했던 예술의 정치화와 정치의 예술화 두가지 모두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고, 현실에서도 두가지 모두가 일어났던 적이 있다.


하지만 대중예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고 입장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대중예술의 덩치가 자본주의와 함께 더 커진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시간이 지나며 더욱 공고해졌고 이제 상품이 아닌 예술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전에는 대중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이 고급예술보다 적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대중예술이 고급예술이라 불리던 분야를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다. 아무리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작품이 있어도 곧바로 ‘굿즈’가 되어 시장에 편입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점점 몸집을 불리며 만약 대중예술이 곧 우리가 부르는 예술이 된다면 과연 그 때의 예술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맥도날드, 그린버그, 아도르노 등 대중예술을 연구한 상당 수의 학자들은 대중예술을 부정적으로 봤고 몇몇 학자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고, 소수의 학자들만 대중예술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대중예술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학자들은 지금의 대중과 대중예술이 어떻게 변화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해서는 말한 바가 없으므로 오늘날의 대중예술에 대해서는 새로운 가치판단과 토의를 바탕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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