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말,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4(Seoul Indie-AniFest2024)’에 방문했다.
서울인디애니페스트는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국내 유일의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제다. ‘어떤 위기의 순간이 닥쳐도 모두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다’는 선언을 토대로 ‘이영차’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9월 26일, 개막의 장을 올렸다. 독립보행, 새벽비행, 랜선비행, 미리내로 등 여러 섹션을 통해 국내외의 다채로운 장,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관객들을 만났다.
미리내로1, 독립보행2 섹션의 영화를 감상했다. 우선 미리내로는 장편 부문으로, 총 17편의 접수작 중 4편의 본선 진출작을 만나볼 수 있었던 섹션이다. 호러 장르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그리고 사회 풍자극까지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개성 있는 작품들이 자리했다. 네 개의 작품들 사이에서 ‘술타나의 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독립보행은 국내 공모 단편 부문으로, 교육기관의 교육과정 내에서 제작되지 않은 일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섹션이다. 총 72편의 출품작 중 25편이 본선 진출작으로 경합을 벌였다. ‘일루전’, ‘가장 슬픈 눈물’, ‘삡’, ‘생의 기쁨 삶의 기쁨’, ‘옷장 속 사람들’, ‘뉴-월드 관광’, ‘색적성능시험’, ‘엔터티’까지 여덟 작품으로 구성된 독립보행2를 감상했다.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도전을 멈추지 않는 독립 애니메이션의 비범한 행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직접 감상한 아홉 편의 영화들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가장 깊게 남았다고 느낀 두 개의 영화에 대한 단상을 써 내려보고자 한다.
술타나의 꿈, Sultana’s Dream

먼저 독일, 스페인의 장편 영화 ‘술타나의 꿈(Sultana’s Dream)’이다. 스페인의 한 예술가 이네스는 인도에서 술타나의 꿈이라는 제목을 가진 공상과학 고전 서적을 발견한다. 책 속에는 여성이 나라를 지배하고 남성은 집 안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당시 인도의 현실과 정반대인 세계가 펼쳐진다. 책에서 영감을 받아 모든 여성이 안전한 유토피아 레이디랜드(Ladyland)를 향해 곳곳을 탐험하는 이네스의 여정을 그린다. 인도의 전통문양과 수채화의 색감을 이용한 작화가 새롭고 인상적이다.
영화 속 이네스의 모습처럼, 실제로 감독 이사벨이 1905년 인도 벵골에서 쓰인 페미니스트 공상과학 단편소설에서 착안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여성에게 완전히 안전한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1905년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은 현실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출발한 작품임을 느낀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러니까 여성이 그 어떤 부당도, 그 어떤 위협의 불안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이 당연한 물음에도 고개를 가로젓게 되는 현실에 목소리를 내는 영화다. 현실이 아닌 꿈의 세계에서만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이네스의 모습에서 현재의 여성들을 본다.
여전히 몇몇 여성 혐오 범죄 기사에 ‘여자들이 밤에 조심해야 한다’, ‘12시가 넘으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다’며 피해자를 탓하는 댓글이 달리는 세상이 버겁다. 당연한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면 도리어 ‘말조심해야 한다’는 질타가 날아오는 세상이 무섭다. 이렇게 지긋지긋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를 말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영화가 있어 또다시 조금의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극장을 나섰다.
뉴-월드 관광, New-world Tour
한국의 단편 영화 ‘뉴-월드 관광(New-world Tour)’은 1970년대 말, 한 가족이 떠난 여름 바캉스 속 소소한 순간들을 그린다. 엄마, 아빠, 그리고 네 아이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바다가 있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 바다에 도착해 형형색색의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정신없이 물놀이를 하고, 작은 민박집에서 큰 수건을 둘러쓴 채 버너에 끓인 라면을 먹고,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나란히 서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아이의 시점에서 올려다 본 엄마의 옆얼굴, 저녁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엄마의 머리카락, 그리고 카메라 뒤에 서서 구도를 맞추고 셔터를 누르는 아빠의 모습까지. 아이가 바다에서 눈에 담은 그 기억은 곧 흐릿해지겠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 마음 한구석에 소중히 남아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느낀다.
애니메이션의 동화 같은 작화와 옅고 부드러운 채색이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들을 불러온다. 가족 여행을 떠나는 길에 멀미를 해 엄마가 입에 비닐봉지를 대주던 기억이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넓고 푸른 바다의 모래사장을 밟아 본 기억처럼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작은 순간들이 나를 그때 그 시절로 데려간다.
10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나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나의 것이라고 느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겠지만 보면서 목이 메고 눈가가 발개지는 경험을 했다. 타인과 공통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 겪어도 귀하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바닷가로 떠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