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다 [영화]

영화 ‘새벽의 모든(All the Long Nights)’
글 입력 2024.09.2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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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통이 있다. 평소 두통이 자주 찾아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참을 만한 정도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다른 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겪는다. 정확히 12년째 주기적으로 극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다. 하루에서 이틀 동안 머리 한 쪽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 머리가 쿵쿵 울리고, 눈앞에 섬광이 번쩍거리고, 속이 하루 종일 메슥거린다. 전날부터 전조 증상이 나타나고, 아프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을 듣고 나면 매번 안도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낀다. 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말에 괜히 내 성격을 탓할 때도 많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다고 느끼는 시기에도 으레 두통이 찾아오고, 약을 먹어도 전혀 낫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견디고 나면 깨끗이 없어져 있는 고통에 허탈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증상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주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특히 중요한 날에 머리가 아파오면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다. 시험 전날에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또 때로는 두통 때문에 조퇴해야 한다거나, 일정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 별것 아닌 일로 엄살떠는 것 같을까 봐 불안해지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대단한 질병이 아니니까, 그리고 훨씬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도 많으니까 마땅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느낀다. 그래도 몸이 너무 힘든데 밖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쓸 때나, 억지로 참다가 혼자 화장실로 달려가야 할 때는 솔직히 조금 버겁다.

 

‘새벽의 모든’이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후지사와의 모습에서 나의 것과 비슷한 고통을 본다. 후지사와는 월경전증후군(PMS)으로 인해 한 달에 한 번, 지옥 같은 시간을 겪는다. 신체적 이상과 함께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평소에는 예사롭게 넘기던 사소한 일에도 괜히 성질이 나고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하늘에 구멍이 뚫릴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 직장 상사에게 짜증을 뱉어 내고 뛰쳐나와 바깥 벤치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다.

 

매달 찾아오는 고통이지만 익숙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후지사와의 표정에서 두려움을 읽는다. 내가 내 감정을 억제하고 다스릴 수 없어 무섭고, 주변에 또 피해를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속을 태운다. 그렇게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심각한 외상이 없기에 누군가는 별일 아닌 증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직접 겪고 있는 이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게 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니까, 그녀는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작은 회사 쿠리타 과학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다행히 선하고 친절한 동료들을 만나 새 회사 생활이 순조롭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외근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간식이라도 사 오면 서로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후지사와는 좋은 동료들 사이에서 점차 일에 적응해 간다.

 

그런데 동료 중 한 사람, 야마조에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한다. 어김없이 PMS가 찾아온 날, 일이 터진다. 내내 성의 없이 일하고, 회사에 손님이 찾아와 인사를 건네도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의 모습이 계속해서 거슬린다. 짜증이 쌓여가던 중, 야마조에가 달고 살던 탄산수의 김이 빠지는 소리가 도화선이 된다. 사소한 행동에도 예민함이 극에 달할 수 있다는 증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참을성이 바닥난 후지사와는 그렇게 분노를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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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후지사와가 사과를 건네면서, 그리고 야마조에가 회사에서 공황장애로 발작을 일으켰을 때 후지사와가 그를 도와주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서로의 고통을 알게 된 후 관계가 변화한다. 내 몸인데도, 내 마음인데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비슷한 아픔을 읽고 동질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내 상대를 조금씩 알아가려 애쓰는 모습이 애틋함을 불러일으킨다.

 

회사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료로서 서로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마음을 연다. 인터넷에 공황장애 증상을 검색해 보고, PMS의 고통을 다룬 책을 읽고, 끼니를 거를까 봐 주먹밥을 사서 건네는 작은 배려들이 다정하다. 서툰 손길로 머리 자르는 것을 도와주고, 대중교통 대신 탈 수 있는 자전거를 건네는 작은 행동들이 따뜻함을 더한다.

 

오래 알고 지낸 관계가 아님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선명하게 비친다. 극적인 변화나 격정적인 감정의 파동 없이도 내내 덤덤하고 예사롭게 두 사람 간의 선의를 다룬다. 16mm 필름의 거친 질감과 절제된 장면 연출 역시 이에 알맞은 선택으로 느껴진다.

 

후지사와는 공황장애를 겪지 않고, 야마조에는 PMS를 겪지 못하지만 서로 담담한 위로를 건넬 수는 있다. 타인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남의 어려움을 쉽게 여기지 않고 작은 마음을 쓰거나 작은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함께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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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S, 공황장애, 그리고 각자가 안고 있는 여러 고통, 상처, 아픔, 슬픔 같은 것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뿐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본인과 타인의 고통에 무겁게는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마음을 쓴다. 먼저 떠난 가족을 온 마음 다해 그리워하거나,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감정을 나누면서, 괴로운 삶이지만 충실히 살아가려 한다. 본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 중 그 어느 것도 절대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모두 다른 개인이지만, 그러니까 사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지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꼭 깊은 유대가 아니더라도, 단지 느슨한 연결에 그치는 관계일 뿐이더라도 이들은 기꺼이 서로에게 힘을 보탠다. ‘사는 게 괴롭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는 진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천천히 그리고 미지근하게 서로를 돕는다.

 

영화의 후반부, 이동식 플라네타륨 안에서 무수히 빛나는 별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느낀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처럼, 우리는 가까이 닿아 있지 않더라도 세상 어딘가에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어두워져야만 다른 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마주한 어둠이 나와 타인을 연결시킨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진다.

 

어둡고 고요한 정적을 지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고통에 버거워질 때마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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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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