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귀함을 위한 투쟁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8.0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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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그리고 현재의 시간을 조명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게 된 이 책은 오월이 되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살았을 공간, 시간, 그때의 그들이 느꼈을 감정과 생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책을 펼치면 열여섯 소년 동호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동호는 혼을 “어린 새”에 비유한다. 외할머니의 죽음과 상무관에 있는 시신, 군인의 총을 맞고 죽은 이름 모를 이들의 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혼이 되거나 혼이 된 사람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작품에서 혼은 죽지 않는 영원의 존재이며 인간이 죽은 순간 그들의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어린 새이다. 우리의 곁에 머물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동호의 친구, 이미 죽어버린, 혼의 상태로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정대는 과거를 떠올리고 현재를 마주하고 그 시간을 증오하다가도 결국엔 자신의 삶과 가장 가까웠던 동호, 그리고 누나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혼이 된 정대의 욕망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물기. 사람의 곁에 머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죽어서도 잊을 수 없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감히 잊지 못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이 잊을 수 없는 과거와 잊지 못할 과거, 두 가지의 과거를 ‘혼’이라는 형태로 정의내리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작품의 제목을 떠올릴 수 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는 “소년은 이미 죽어서 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넋으로도 오고, 우리가 호명하면 오는 존재라고 생각한다.”김종일, 「소년이 온다」, 『당당뉴스』, 2022.1.10., (2024.06.22.)고 밝혔다. 이 작품에서 ‘소년’이란, 우리가 마주하는 과거이며 누군가의 혼이다. 동시에 소설 속 인물들이 지키려 했고 곁에 있었던 열여섯 소년 동호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아는 동생이자 동료였던 인물. 5월 18일 광주에 있었던 인물.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리가 호명해야할 존재는 누구일까? 그들은 어떤 사람일까? <소년이 온다>는 6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해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들은 모두 5월 18일의 기억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죽어 혼이 되어버린 존재, 혼을 부르는 존재, 혼을 기리는 존재. 작품은 현실에서 먼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삶에서 먼 인물이 아닌 우리의 역사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망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욕망을 가졌고 그날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던, 그리고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 5월 18일의 광주와 그후 남겨진 사람들이 떠오른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폭력의 과거는 지우려 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곁에 있을 혼처럼.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은 그날의 광주를 다루며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인간이 저지른 폭력과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낸 폭력의 피해자들을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실제로 나 또한 소설을 읽을 때마다 폭력적인 묘사를 한 번에 다 읽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이 겪었을 고통이 상상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혼이 이국에 갔는지, 천국에 갔는지 혹은 누군가를 잊지 못해 아직도 이승을 떠도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남겨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디에 있을지 모를 어린 새들, 즉 혼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것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동호와 정대, 정미, 진수, 은숙, 선주, 동호의 어머니가 있다. 여기서 동호와 정대, 정미는 혼이 된 존재들이다. 남겨진 진수, 은숙, 선주와 동호의 어머니는 각자의 방식으로 혼을 기억하게 된다. 소설의 제 3장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광주에서 살아남은 뒤 편집 관련된 일을 하는 은숙의 삶은 5월 18일 이후로 장례식이 된다. 하루하루가 장례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설은 저울질 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을 길고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동호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순간을,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은숙의 삶을 장례식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은숙은 형사에게 취조 받으며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그녀는 그 일곱 대의 뺨을 잊으려 하지만 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은숙이 느낀 일곱 대의 뺨의 무게보다 동호를 향한 죄책감의 무게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일곱 번째의 뺨을 잊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은숙의 애도 방식은 이러하다.

 

남겨진 다른 이들 또한 은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지며 기억하고 또 애도하였다.

 

진수는 그중 혼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는 유서와 함께 동호의 사진을 남긴 뒤 생을 끝냈다. 이때 동호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진수의 영혼은 이미 유리였을지도 모른다. 몸속에 지니고 다니며 그것이 언제 깨질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하는 유리인 것이다. 이미 유리가 되어버린 영혼을 붙들며, 진수는 현재를 살아갔다.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부서지기 이전의 영혼은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진수를 움직이게 하고 모두를 움직이게 하는 그것은 사람의 원동력이었다.

 

거창한 의미가 아니어도, 깊은 메시지를 부여하지 않아도 남겨진 이들이 보여준 그들의 양심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보여준 양심일까? 혹은 그들이 받은 폭력이 사실 인간의 본질이었을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라는 소설의 질문에 사람은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답은 소설에 이미 나와 있다. 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사람에게 겨누지 않았던 순간의 양심,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광주에서 싸웠던 그날의 사람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양심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진수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얇고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깨끗하고 투명할 것이다. 그 유리를 깨지 않는 사람들만이 양심의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인간은 고귀할까? 선주는 고문을 받았던 기억을 살려 녹음한다. 그 기억은 인간의 존엄이 처참히 짓밟혀 색을 잃어버린 기억이다. 그 기억에는 그녀가 잊지 못하는 동호가 있고 정미가 있고 성희 언니가 있으며 선주가 있다. 인간이 투쟁하는 이유는 지금 현재를 위해서만이 아닐 것이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위해, 현재를 위해, 미래를 위해 투쟁한다. 용감하거나 강하지 않더라도 깨닫는다. 그날의 기억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선주는 투쟁의 기억을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 묻으려 하지만 묻지 못한다. 그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고귀해.” 

 

 

선주가 깨달은 것은 과거 성희 언니가 말했던 인간의 ‘고귀함’이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랐던 성희 언니의 목소리는 선주에게 인간은 고귀하다는 걸, 그렇기에 너의 존재도 고귀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그 말은 선주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자 믿음이다. 선주는 자신 스스로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용감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귀함에는 용감함과 강함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모두 고귀하고 고귀하기 때문에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투쟁을 이어온 이유는 이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것을 훼손하는 것은 폭력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투쟁할 것이다. 사람은 고귀하고 사람이었던 혼의 존재 역시 고귀하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고귀함’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존엄을 훼손하는 장면을 드러내며 역설적으로 인간의 고귀함과 양심에 대해 생각하게 할 여지를 쥐어준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하였던 동호는, 이 작품의 소년은 동호의 어머니에겐 그저 따스함이 곁든 햇살 같은 아이였다. 그러한 동호가 혼이 된 지금, 소년이 지켜야 했던, 지켜야만 했던 인간의 근원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 마지막 장에선 지금까지 이어져오던 여러 메시지가 한 갈래로 합쳐진다.

 

죄책감, 양심, 폭력, 비폭력, 투쟁, 고귀함. 이 모든 단어를 수식했던 동호는 그저 따뜻했던 소년이었다. 한 명의 사람. 책은 5월 18일 광주를 움직이고, 또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염원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귀함을 잃지 않으며 자신이 생각한 길로 나아갈 것이다. 그들이 꽃 핀 쪽으로 나아가 걷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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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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