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도 실전이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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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의 한국 영화 역사 발굴 프로젝트
한국영상자료원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 고전 영화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주로 하며, 한국 영화의 계보를 다지며 한국 영화가 나아갈 길을 각종 영화인이 참고할 수 있는 일종의 영화 도서관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무료로 시네마테크 상영도 하는데, 프로그램이 언제나 기가 막힌다. 방문해 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나이대 사람들이 좌석에 앉아 있다. 이들은 한국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 젊은 힙스터이자 젊은 시절 봤던 영화를 추억하며 다시 찾아오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다. 그러니 인기 프로그램은 까딱 예매를 잊었다가는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은근히 경쟁이 치열한 문화적 공간이다.
다양한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 영자원은 원하는 영화를 도저히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찾을 수 없을 때 최후의 보루로 가는 곳이기도 하다. 권리가 없어 플랫폼에서 서비스하지 못하는 영상들이 이곳에는 간혹 CD, DVD 등으로 존재한다. 돈이 없고 정보가 없어, 혹은 지방에 살아 특별 상영 스케줄을 맞출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열려 있는 곳. 궁금하다면 한번 방문해 보기를.
이런 한국영상자료원이 개관 50주년을 맞이해 역대 최대 규모의 시네마테크를 개최했다. 6월 13일부터 시작한 이번 기획전에서는 한국 발굴작, 한국 복원작, 해외 복원작 총 28편이 상영될 예정. 그중 6월 22일 <지독한 사랑>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한국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을 소개할 때 거의 의무처럼 사용하는 수식어다. 이런 별명이 붙게 된 까닭은 말 그대로 그가 연출하는 영상의 스타일이 그간 한국에서 본 것들과는 차별화되고 독특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탄생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그를 둘러싼 수식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하기 시작하던 시대의 한국 영화계를 조금 알아보면 좋다. 바로 코리안 뉴웨이브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 한국 영화계에는 대규모 자본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민주화 이후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문화 측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코리안 뉴웨이브의 양 축으로 여겨지는 장선우, 박광수 감독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형식으로 격변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비추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이명세 감독만이 ‘스타일리스트’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다른 감독들이 한국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정치적, 사회적 참여의 수단으로 작품을 이용했던 것과 다르게, 그의 영화에서는 뚜렷한 사회적 배경과 정치적 맥락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세 감독은 한국의 현실이나 사회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반영하고, 거기에 대한 어떠한 의견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개개인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 차원의 이야기를 만드는 감독인 것 같다. 예를 들어 그의 영화를 설명하자면, 쉽게 ‘영화감독을 꿈꾸는 삼류 코미디언의 백일몽’(개그맨), ‘불륜 관계인 커플의 흥망성쇠’(지독한 사랑) 정도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 소재들만으로는 시대적 배경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영상은 이국적이고 서정적인 모습을 담았고,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그가 한국영화 이미지의 기준을 한층 세련된 곳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독한 사랑>에서 영민과 영희가 사람의 시선을 피해 도망 와 마주하는 폐허, 그리고 사랑의 오두막은 동화 같다.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트인데, 이런 동화적인 세트가 오히려 두 사람의 철없는 사랑을 더욱 부각한다.
단순히 세트나 소품의 연극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들의 러브신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다. 많은 사람들이 롱테이크로 잡는 4분 30여 초 가량의 러브신 말고도, 더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아직 동거 이전에 리베라 호텔에서 나누는 사랑인데, 과장됐다 싶을 정도로 역동적인 구도와 자세로 이들의 사랑을 보여준다. 웬만해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구도다. 좀 웃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랑은 웃기다.
‘불륜 영화’의 계보 속 거스러미 하나
영화의 소재는 여러모로 논란이 될 만한 소재, 그렇지만 한국 영화에서 주구장창 다뤄 온 소재인 불륜이다. 대학 교수이자 시인인 유부남 영민과 문화부 기자 영희는 그녀가 쓴 시평으로 처음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부산 다대포 앞 모래사장 근처에 허름한 셋방을 얻어 살림을 차리고, 지독한 사랑과 그 뒤에 닥쳐오는 냉엄한 현실을 함께 치러내기 시작하는 내용, 그러니까 외도로 만나게 된 남녀가 사랑의 도피를 하고 우여곡절을 겪는 내용이다.
한국 영화는 오래 전부터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불륜 영화’는 주로 사회적 시선으로 인한 불륜 당사자들의 내면적 갈등과 불륜 배우자와 불륜 상대와의 갈등을 보여주는 게 주였다. 가정의 파괴를 부정적으로 그리며, 온전한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촉구하거나, 온전한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를 보여주는, 기존의 사회 통념을 고려한 일관된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사랑>에서는 오로지 불륜 남녀인 영희와 영민의 관계가 시작되고 끝나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흔한 배우자와의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민은 아내에게 자신의 외도 사실을 알리지만, 그 이후 아내의 반응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영민과 영희의 셋방살이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한 커플의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혹자는 ‘불륜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윤리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런 걱정은 절대로 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면 이들의 아주 구질구질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 ‘불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왔던 가족을 제거하고 오로지 불륜 관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지독한 사랑>은 당대 한국의 (불륜) 영화의 계보에서 조금 독특한 포지션을 차지한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념 갈등이 강하게 남아있고, 하늘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1983년, 중국 민항기가 한국 상공에 진입했고 서울 수도권에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지금 이 상황은 거짓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그럼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하는 막연함을 상상해 보자. 아마 지난해 5월 울려 퍼졌던 재난 문자로 서울 수도권 인구가 심장을 떨었던 때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기존 시나리오에서는 이 민항기 진입 사건을 다룬 뉴스로 영화를 시작하려 했으나, 시대적 배경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그러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랑도 실제상황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으로 추측되는데, 그만큼 사랑의 치열함을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지독한 사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세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영화를 ‘기름 냄새 나는 사랑 이야기’로 정의했다. 그것은 단순히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영민과 영희의 사랑의 과정이 일종의 폭력적인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희와 영민은 서로 폭력을 주고받는다. 자칫 잘못하면 여성 폭력의 재현이 노골적이어서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강수연 배우의 독특한 캐릭터와 훌륭한 연기로 두 주인공의 에너지가 절대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서로 때리고 할퀴는 지독한 사랑에서 동등한 에너지를 갖는다.
사회적으로 제법 지위가 있는 직업을 가진 둘을 생각했을 때, 이들의 연애는 유치하고 유아적으로 느껴진다.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면 조소가 나올 정도인데, ‘액션 장면은 로맨틱하게, 사랑 장면은 액션 영화와 같이’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명세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사랑싸움 장면에서는 정말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예를 들어 영희가 동화 같은 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사랑엔 유효기간이 있음을 실감하는 장면이 있다. 영희는 둘만의 아지트로 다시 돌아와 영민에 시비를 걸고, 결국 시비는 몸싸움으로 번지게 되는데, 이때 둘은 정말 미친 듯이 싸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불쾌하지 않고 우스운 이유는, 영민이 분에 이기지 못하면서도 이불을 둘러싸고 영희를 베개로 때리는 등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으로 영희에 폭력을 가하고, 이 폭력이 아주 한심하고 우습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해지는 영희의 언어적 폭력이 가관인데, 영희는 맞으면서도 ‘여자를 패려고 태권도를 배웠냐’는 등 영민의 유약한 내면을 비웃는다. 이토록 한심한 ‘실제 상황’이라니. 이 영화는 뻔한 듯 뻔하지 않게 강한 에너지로 밀고 나가는 맛이 있다. 첫 시퀀스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조직폭력배 장면과도 같이 강렬한 폭력에 가까운 사랑을 그리는 데 탁월하다.
[류나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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