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Underwater

글 입력 2024.04.3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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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삭임이 들린다면

나를 다시 찾아줘

우린 함께할 수 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장소

초록 물이 있는 곳으로, 내 일부와 함께...'

그녀는 숨이 멎을 듯 꿈에서 깨어나 머리맡에 놓인 작은 하얀색 캡슐을 잡아채듯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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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해가 서서히 땅 아래로 사라져 갔다. 하늘에서 붉은빛이 서서히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어두운 파란빛이 스며들었다. 때는 한여름의 저녁이었다. 작고 고요한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습하고 더운 공기로 가득한 이곳에는 버려진 건물이 하나 있었다. 한산하고 아름다운 주변 광경을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기 때문에 과거 많은 10대와 20대들이 찾아오는 장소였다.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한 곳은 아래쪽의, 지하수가 솟아나는 샘으로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이곳에서 수영을 즐기는 경우도 잦았으나, 사람이 빠져 죽었다는 괴담, 악어나 괴물이 살고 있다는 괴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실제로 젊은 여성이 빠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거의 끊기게 되었다. 낮에는 주변을 서성거리는 사람 몇이 있을 뿐이었고, 밤에는 담력을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철없는 아이들이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주변을 대부분 집어삼킨 시간이 다가오자, 외로움으로 가득 찬 건물 앞은 꺼질듯 말듯 한 조명 몇 개로 겨우 밝혀지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고요와 죽음이 깔린 밤이 지나갈 듯 하였다. 하지만 이때 긴 외투를 입은 누군가가 건물을 향해 걸어왔다. 동행자 없이 혼자 저벅저벅 걷는 그는 주변을 둘러보거나 서성이는 모습 없이, 마치 특정 목적을 가진 듯이 묵묵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처음 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는 계단 위에 쌓인 모래를 밟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수가 흐르는 샘 앞에 도착하자 그는 외투를 벗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였다. 레이는 군데군데가 찢어진 군청색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상반신에 입은 하얀색 티셔츠 아래로 검은색 브래지어가 은은하게 비쳤다. 겉모습만 본다면 일탈과 유흥을 위해 이곳을 찾던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목적으로 샘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이 샘에 돌아온 레이는 어떻게 물이 이렇게 맑게 유지될까 생각했다. 레이는 맑지만 검은 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깊게 잠긴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내면과도 같은, 어둡고 차가운 물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물 깊은 곳에서, 녹색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녹색 빛은 점점 커져 갔고, 빛은 샘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물속 깊은 곳의 무언가가 샘 위로 올라오는 듯했다. 레이는 빨리 외투를 뒤졌다. 그리고는 작은 하얀색 캡슐을 찾아냈다. 하얀색 캡슐을 열고 레이는 짧은 머리카락 몇 줄을 꺼내들었다. 이곳에서 빠져 죽은 옛 연인 사샤의 머리카락이었다. 어젯밤 꿈에 들린 사샤의 목소리가 말한 대로, 레이는 둘이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이곳에 와 있었고, 초록색 물이 눈앞에 곱게 펼쳐져 있었다. 레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물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물은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따뜻하고 뜨거운 감촉을 가졌다. 레이는 처음 느끼는 이러한 감촉에 신기해하면서도 물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다리부터 잠기기 시작해서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곳까지 레이는 나아갔다. 가슴이 물에 잠기자 불안하고 거칠게 뛰던 심장이 진정된 듯한 요상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는 머리카락을 물 깊은 곳으로 밀어넣듯이 뿌렸다.


어젯밤의 꿈에서 지시받지 않은 사항이지만, 마치 가슴이 레이에게 이렇게 시키는 듯 했다. 사샤를 다시 만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알수 없는 감각이 레이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 머리카락을 물속으로 털어놓고 레이는 손을 수면 위로 빼냈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고, 약간의 점성과 함께 윤기, 빛이 뿜어나오는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레이는 머리카락을 뿌린 장소에서 잠시 뒷걸음쳐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레이의 시선은 물의 안쪽, 가장 환한 빛이 있는 듯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 깊은 곳에서 사샤의 얼굴과 비슷한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상은 희미했지만, 사샤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 아래로 사샤의 가슴과 팔까지 보이는 듯 했다. 레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잠수해서 헤엄쳐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몸이 섣불리 떨어지지 않았다. 사샤의 형상은 더욱 가까워지고 뚜렷해지고 있었다. 레이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레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소리없이 울고 기뻐하는 레이의 앞으로 사샤의 형상이 다가왔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다시 사샤의 얼굴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샤는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잠겨 있었지만, 레이는 사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레이는 사샤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 위해 물속으로 잠수했다.


레이의 눈이 수면 아래로 잠기자, 그녀의 눈앞에 초록 물과 사샤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피처럼 새빨간 물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눈 없는 괴물이 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괴물은 레이의 얼굴을 붙잡았고 레이는 비명을 질렀다. 레이는 물속 깊은 곳으로 끌려갔다.

 

*

 

레이의 외투만이 남겨진 채 죽음같이 조용한 밤이 흘렀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떠오르는 태양은 건물 안쪽과 샘에 희미한 빛을 비추었다. 아침 태양의 붉은빛은 이곳에서는 생기와 활력이 아닌 죽음의 의미를 가지는 듯 했다.


고요한 물길을 뚫고서, 레이와 사샤가 손을 잡고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레이와 사샤가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딴 괴물들이었을 뿐이었다. 오랜 기간 이곳에서 살던 괴물들은 사람들을 잡아먹은 다음, 그의 기억을 뒤져 가장 소중한 사람을 꿈을 통해서 유인한다. 그리고 희생자의 유품이나 신체의 일부를 가져오도록 해 희생자를 되살릴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그리고 새로운 희생자를 유인한 다음 그들의 모습을 훔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죽음의 가면을 쓰고 세상으로 나아간 괴물들은 아직까지는 극소수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교체하기까지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레이와 사샤의 가면을 쓴 괴물들은 외투를 집어들어 그들의 몸을 함께 감싼 다음, 건물 밖으로 서서히 걸어 나갔다.


괴물들의 샘 바닥, 레이와 사샤의 영혼은 갇혀 있다. 서로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지만, 괴물들의 핏빛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의 감금은 영원할 것일까? 괴물에 맞설 신비로운 힘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할 것일까? 레이와 사샤의 영혼은 보장 없는 믿음만을 가진 채, 괴물들의 검고 빨간 손길에 맞서 서로만을 껴안을 뿐이었다.

 

 

[하지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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