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세상-뮤지컬 브론테

황량한 요크셔의 들판을 밝히던 브론테 자매들의 세계
글 입력 2024.04.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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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 전에서 날아온 브론테 자매들의 편지


 

뮤지컬의 제목 <브론테>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것은 브론테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인 에어 Jane Eyre>의 저자 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저자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애그니스 그레이 Agnes Gray>의 저자 앤 브론테가 극의 주인공이다. 세 자매는 여성이 글을 쓰는 일 따위는 허락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요크셔의 음울한 황야에서 자랐다.


뛰어난 필력과 강인한 내면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그들의 순항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제약이었다.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정교사로 일하거나, 결혼하여 조신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여성에게 붙는 숙녀라는 칭호는 그들의 성숙을 칭송하는 수식어이자, 사회적 진출과 내적 성장을 가로막는 한계로 작용했다. 이제는 여성이 시와 소설, 논문을 집필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지만 어떤 시대에는 허락의 여부를 논할 정도의 금기였다니. 분명 축복받은 재능의 산물일 글쓰기 능력을 지녔던 세 자매에게는 유감인 일이다.


그렇기에 브론테 자매들이 여성에게 요구되던 의무를 탈피하고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글을 쓰는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하려 했던 것은 혁신적인 생각이었을 테다. 그들은 이야기 안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제약 없이 모든 것을 꿈꾸었다. 자매들은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되기도 했고, 똑똑한 여성에게 불친절한 사회를 비난할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이야기는 여성의 활약을 제한하는 세계의 창을 부수고, 또 다른 세상을 탐구하는 날개였다.


그러니 시대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자매들이 글을 썼던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살아있는 동안에 자매의 작품은 그들의 밀실 안에서 배회했겠지만, 여성의 활동에 불친절하던 세상에 맞서서 그들의 내면을 단단히 지켜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예쁘고 순종적인 여성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충실하게 살았던 강인한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는 시와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실은 일종의 편지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외롭고 황량한 요크셔 벌판에 우리가 살고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 편견 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읽어달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세계도 주류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그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 편지는 오랜 시간을 날아왔고 마침내 그 소망은 이루어졌다. 몇백 년 전의 세상에서 보내진 편지에는 그들의 설움이 녹아들어있다. 그러니 우리는 작가이던 브론테와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 치열하던 브론테의 이름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면을 탐구하며 스스로를 지키고 세상에 변화의 화두를 던지던 브론테 자매들,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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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속, 브론테 자매들의 이야기


 

뮤지컬은 그들을 앞질러 세상을 떠나간 자매들, 마리아와 엘리자베스의 추도식으로 시작된다. 소위 ‘저주받은 목사관’에 사는 세 자매들은 지루하고 평화로운 매일을 보내지만, 그들에게는 상상과 자유로움으로 가득 찬 글 속의 세상이 있었다. 세 자매는 결혼이라는 구속 없이 스스로 돈을 벌며 자유롭게 살기 위해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모았고, 사랑하는 자매임과 동시에 서로의 이야기를 읽고 비평해주는 소중한 동료가 되었다. 그들의 말 그대로 이야기는 ‘자매들의 방패’였던 것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를 쟁취할 브론테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부지런히 글을 쌓아가던 세 자매는 어느날 ‘벨 형제’라는 가명을 빌려 시집을 출판한다. 그러나 판매된 부수는 겨우 한두 권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다. 세 자매는 상심하였고, 특히나 글쓰기에 자신이 없던 둘째 에밀리는 크게 좌절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있던 에밀리에게 신비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에밀리에게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고독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해방되길 바라는 마음을 알고 있다며 목소리는 이야기한다. 순간 들이닥치는 바람처럼, 돌풍처럼, 또 비명처럼 부르는 목소리에 에밀리는 현혹되고 자매들은 그 정체를 궁금해한다.


그들은 이 기묘한 목소리를 소재로 벨 형제들의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기로 한다. ‘광활한 요크셔, 바람, 한 여자가 있었다’는 공통된 문장을 소설의 첫 문장으로 삼아, 먼 미래에서 날아온 목소리를 주제로 하는 소설을 각자의 방식으로 써보기로 한 것이다. 신비로운 목소리에 작가로서 현혹된 자매들은 자기만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리고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낭독회의 날이 되어, 마지막 문장을 완성 짓지 못한 앤을 제외한 샬럿과 에밀리의 소설이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이때 에밀리가 상상한 이야기가 언쟁에 오르게 된다. 이어지지 못한 연인이 죽고 다시 태어나 만나지만 결국 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제안하는 에밀리에게 날카로운 비난을 던지는 샬럿이었다. “또 비극이네? 태양을 갈망하는 것은 좋지만 왜 타죽어야만 해?”라며 샬럿은 에밀리의 이야기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를 꼬집는다. 이에 에밀리가 발끈하여 샬럿의 비판에 맞서자, 포근했던 낭독회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금세 빙판처럼 차가운 공기가 흐른다. 


샬럿이 에밀리의 글을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에밀리의 이야기가 다만 에밀리의 것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벨 형제의 이름을 빌려 그들의 소설로 세상에 공개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그렇게 결혼과 같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쟁취하는 여정의 일환으로서 낭독회를 여는 것이었다. 그러니 샬럿은 늘 전전긍긍,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글을 부정당한 에밀리로서는 쉽사리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결국 지켜보던 앤이 나서 둘 사이를 중재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 좋은 글을 써서 우리의 책을 내는 것이라는 목표를 상기하며 샬럿과 에밀리 자매의 다툼도 마무리된다. 이렇듯, 자매들 사이에서 약간의 갈등은 존재했을지언정 그들은 하나의 꿈, 공통된 미래를 그리며 서로를 다독이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가 도착해오고 그들은 깜짝 놀라고 만다. 그들의 현재와 더불어 미래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는, 일종의 예언 같은 편지였던 것이다. 에밀리에게는 ‘너의 짧은 삶에 얼마나 울었는지. 그렇지만 너 자신을 믿고 나아가야 해’라는 응원을, 반면 샬럿에게는 ‘사랑을 잃어버리기 전에 너의 오만을 버리고 다시 생각해 봐’라는 충고를 보내는 편지였다. 이를 계기로 에밀리는 시집의 실패로 인해 상심했던 마음을 다잡고 확신을 얻게 되지만, 샬럿은 불길한 편지를 불태워버리겠다며 분노한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시작된다. 누군가의 확신과 안심, 그에 반대되는 누군가의 불신과 질투로 인해 자매들 사이의 공기가 달라진다. 샬럿과 에밀리는

 마치 경쟁이라도 벌이는 듯 글을 써내려가고 앤은 둘의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함께하던 자매들이 혼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갈등은 깊어져, 샬럿은 집을 떠나기에 이르고 샬럿과 에밀리는 각각 쓴 이야기로 소설을 출판한다. 하나였던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르게 된 것을 알고 있는 듯, 두 자매의 글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샬럿의 <제인 에어>는 엄청난 열풍을 일으키며 대중과 문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은 악마가 쓴 글이라며 비난 일색이었다. 


그것이 무슨 계기라도 되었는지, 설상가상 에밀리는 점점 야위어가고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단둘만 남은 에밀리와 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견디고, 그때 에밀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앤, 죽음은 악마 같은 것이 아니야. 내게 남겨진,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인 거지. 편안해지는 기분이야. 오래도록 기다려왔어. 내가 죽고 난 미래를.” 그러한 이야기를 유언처럼 남긴 에밀리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언니를 그리워하던 것일까, 막내 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꿈만 같던 추억들은 과거의 것으로 남고, 샬럿만이 혼자 남았다.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이 중요해”


 

세 자매의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극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불길한 편지의 주인공이 밝혀지고 자매들이 함께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지만, 어쩐지 찝찝하고 슬픈 결말이다. 그들이 그리던 미래는 살아있는 동안에 결국 오지 않았다. 자매의 이야기가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세상의 인정을 받고 여성의 이야기가 갖는 힘으로 세상에 충격을 주는 날은, 그리고 충분한 부를 축적해 아무런 제약도 없이 자유로이 살아가는 그날은, 결국 자매들의 상상에 불과하고 말았다.


브론테 자매가 현실의 인물이었고, 세 자매의 결말은 너무나 유명하므로 뮤지컬에서조차 해피엔딩으로 각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담은 이야기, 게다가 자매들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이 이야기가 어째서 의미가 있을까? 뮤지컬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나는 뮤지컬의 마지막 무렵에서 그들이 화목하던 시점을 회고했다.


뮤지컬의 전반에 걸쳐서, 그들이 항상 좇아왔던 것은 글쓰기였다. 스스로를 ‘글쓰기에 미친 인간’으로 일컬으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니 본 뮤지컬의 의미는 브론테 자매의 글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들이 ‘함께’ 글을 쓰고 향유하였다는 것이다.


자매들이 지내던 낡고 초라한 목사관을 떠올려보자. 문과 창문은 낡아 끼익거리고 별안간 소름이 끼치는 바람 소리, 음울한 소음이 들려오는 그들의 방. 가난에 찌들어 일상의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따위는 뒷전이 되고 마는 매일. 그 어디에서 그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자매들마저 지긋지긋했던 낡은 목사관에서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삶에 찌든 매일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브론테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글쓰기를 통해 희망을 보았고 황홀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것은 글쓰기가 가져오는 상상의 힘이기도 하지만, 세 자매들이 공유하는 동일한 정서로 인해 상상의 세계가 더욱 견고해진 덕도 있다. 혼자였다면 그저 ‘말도 안 되는 망상’, ‘현실을 회피하려는 어린아이 같은 공상’ 정도로 취급되었을 그들의 미래는, 함께 꿈꾸었기에 가능한 것이 되고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가 아무리 아름답고 이상적인 세상일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그 속에 홀로 존재하는 풍경만 있는 세상이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그러나 자매들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여전히 함께인 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 글쓰기를 통해 자유와 부를 얻은 미래의 그들을 누군가는 여전히 비난하더라도, 그러한 괴로움마저 함께 이겨낼 수 있는 든든한 자매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브론테는 견딜 수 있었다. 함께한다면 비난받고 무시당하더라도 외롭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을 테니.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글쓰기가 아니라, 함께인 자매들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연의 힘을 거스르고 다시 만난 세 자매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만약 죽음이 그들을 가르지 않았다면 자매들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갔을까. 존재할 수도 없는 장면을 극의 마지막에서나마 보고 싶었던 것은, 그들은 함께일 때 더욱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이렇게 세 자매를 떠나보내고 공연장을 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헛헛하다. 그저 글을 마음껏 쓰는 자유로운 삶만을 바라던 그들은 너무도 일찍 떠나버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숨을 거두어, 지금은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뮤지컬을 보고 나니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애정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 위로 이러한 상상을 덧그려본다. 죽음 이후, 그들이 어디선가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만나는 세상을 상상한다. 그곳이 인간의 세계이던, 혹은 그 이상의 천계에 가깝던, 아무튼 브론테의 자유를 허락하는 너그러운 세상일 것이다. 만약 그런 세상이라면 그들은 더 이상 ‘브론테’ 자매가 아닐 테고, 자유로움을 쟁취한 자매들이 더는 글을 발표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만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시대가 져버린, 그리고 가난과 무관심이 져버린 그네들의 삶이 어디선가 다시 꽃피울 기회라도 있으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 오히려 편안해진다고 이야기하던 에밀리는 당장 앞으로 닥쳐오는 죽음에 겨워 꿈꾸던 미래마저 모두 포기해버렸을 것이다. 그 뒤를 따르던 앤은 홀로 남아있을 샬럿을 떠올리며 얼마나 슬퍼했을지, 그리고 홀로 남은 샬럿은 모두를 떠나보내고 얼마나 외로웠을지, 이런 것들을 상상하면 무척이나 슬퍼진다.


이미 한참 과거의 인간인 그네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는 브론테의 이름으로 그리 괴로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들은 영원한 안식에 이르렀을까, 이제는 그들의 작품을 인정한 세상에 만족했을까, 또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얼빠진 질문, 대답 따위는 바랄 수도 없는 질문을 나직하게 물으며 무대 위 반짝이던 자매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떠올린다. 죽음도 없고, 성별과 형편의 제약도 없이 따뜻한 언덕을 활보하며 꺄르르 웃는 그녀들이 있는 세상. 그렇게 빛나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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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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