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라벨,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공연]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만끽하다
글 입력 2024.03.1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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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날이 채 풀리기도 전이지만 3월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조금씩 봄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완연한 봄을 기다리며 듣기에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만큼 적격인 곡도 없다.

 

봄이란 계절은 꽤나 변덕스럽다. 생명이 다시 고개를 내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기. 어떤 생명은 피어나고 어떤 생명은 아직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않아 봄의 풍경은 들쑥날쑥하다. 날씨도 일교차가 커서 종잡을 수 없다. 햇볕 아래에 있으면 지나온 겨울에 비해 한결 따뜻하지만 살갗에 닿는 바람은 아직 쌀쌀하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은 이런 생동하는 봄의 자연을 소리로 옮겨온 듯한 곡이다. 타악기의 ‘챱!’ 소리와 함께 다소 급작스럽게 시작하는 이 곡은 20여 분 동안 때론 요란하게, 때론 몽환적으로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선율과 리듬으로 흘러간다.

 

3월 9일, 초봄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선곡이 있을까.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윤한결 지휘자와 장 에프랑 바부제와 함께한 이날 공연에는 라벨 피아노 협주곡은 물론이고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도 함께 연주되었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두 개를 한 공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흔치 않은 기회인데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과 ‘불새’까지, 현대 음악으로 넘어가기 전 후기 낭만 작곡가 특유의 낯설지만 고전 낭만주의적인 선율과 구조가 살아있는 곡들로 봄의 기운을 즐기기에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지난 해 한국인 최초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을 받은 윤한결 지휘자와 라벨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진 피아니스트 장 에프랑 바부제의 만남으로 공연 전부터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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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바부제가 연주한 2개의 라벨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바부제는 두 곡 모두에서 라벨 스페셜리스트다운 연주를 선보였다.

 

롯데콘서트홀은 잔향이 많고 울림이 심한 홀이라서 피아노 연주가 뭉개지거나 먹먹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공연 내내 롯데콘서트홀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을 정도로 바부제의 타건은 명징하고 시원했다. 페달을 적재적소에만 깔끔하게 사용했고 아티큘레이션이 매우 또랑또랑하게 살아 있었다. 페달 없이 끝음을 건조하게 처리하는 과감한 부분도 많았다. 2층까지 모든 음이 명확하고 시원시원하게 뻗어져 나왔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은 앞서 말한 대로 변덕스러운 리듬과 선율이 매력적인 곡인데, 바부제는 음량 다이내믹과 템포를 능수능란하게 밀고 당기면서 다양한 색채를 뿜어냈다. 익히 들어온 지메르만이나 조성진의 연주보다는 조금 더 현대적이고 재지한 느낌이 났다. 라벨은 드뷔시만큼 몽환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수채화에 가까운 음악 세계를 가진 작곡가라는 인상이었는데 바부제가 해석한 라벨은 원색 물감을 막 쏟아 놓은 것 같은 현대미술 같았다.

 

특히 정처 없이 어딘가를 떠도는 몽환적인 느낌으로 익숙한 2악장은 바부제의 묵직한 타건이 약간 낯설다가도 중반쯤에 나른하게 고음부를 맴도는 부분이 좀 더 선명해지면서 마치 별빛 가루가 뿌려지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2악장의 마무리도 언제 끝났는지 모를 만큼 사라져가듯이 끝나는 인상이었는데, 바부제는 마지막 음을 종소리처럼 울리며 선명한 마침표를 찍고 잔향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전반적으로 꽤 신선하게 다가오는 해석이었다.

 

2부에서 연주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서도 바부제의 화려한 테크닉과 다채로운 음색이 빛을 발했다. 새삼 왼손 연주만으로도 이렇게 완전한 협주곡을 작곡한 라벨도, 이걸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도 대단해 보였다.

 

열띤 환호에 응답한 바부제는 총 3곡의 앵콜을 선사했는데 모두 본 프로그램과 맥을 같이 하는 후기 낭만 작곡가들의 곡이었다. 마치 바부제의 미니 리사이틀처럼 느껴졌다. 반응이 워낙 좋았어서 단독 리사이틀 공연이 있었다면 협연에 온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예정된 게 없어서 아쉬웠다. 공연 내내 무대 매너도 무척 쾌활했고 온몸을 내던지며 다이나믹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도 화려함을 더했다.

 

피아노 협주곡 앞뒤로 연주된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과 ‘불새’도 생동감 넘쳤다.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의 곡들은 바부제가 일전에 인터뷰한 것처럼 다양한 질감과 색감의 천이 마구 덧대어진 ‘패치워크’ 같은 음악이다. 협과 불협이 공존하는 낭만-현대곡들만이 선사할 수 있는 몽환적이면서도 쨍한 색채감이 있다. 낯선 문물이 마구 뒤섞이는 혼란스러운 당시 시대의 분위기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관악기의 잦은 실수가 아쉬웠고 플룻 소리도 더 존재감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했다. 곳곳에서 빵빵 터지는 부분이 많은 곡들이라 타악기군이 보통 때보다 무척 바빴을 것 같다. 덕분에 폭발력 있고 생기 넘치는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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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완연한 봄을 기대하며, 봄의 기운을 잔뜩 받아간다.

 

 

[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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