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효신에게 [영화]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1999)
글 입력 2024.03.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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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신의 다이어리 속 진심을 읽는 민아.

 

 

효신이 잘 지내니. 네가 다이어리를 잃어버리고 모든 사건이 시작된 지 25년이 흘렀어.

 

오늘은 갑자기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아마 내가 무심코 꺼낸 나의 빨간 다이어리가 너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붙인 알록달록한 스티커들 위에 네가 그린 순진하면서도 광기를 담은 그림들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야. 혹은 시은이가 그린 몇 안 되는 페이지들처럼, 내 다이어리 뒷부분도 그렇게 싱겁게 끝날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겠지.

 

다른 사람들이 네 다이어리를 보고 놀라버린 걸 기억해. 마치 만지지 못할 것을 만진 듯 화들짝 놀라는 반응. 아무래도, 그것이 너의 것임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이겠지.

 

너 말고 누가 펼친 페이지 가득 정성스레 꾸민 그림을, 염원을, 사랑을, 이별을, 좌절을 한 땀 한 땀 떠 놓을 수 있겠어? 일종의 저주같이 느껴진 거야, 그래서 페이지를 열고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던 거야. 너의 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웠던 거야.

 

 

아무도 없다. 아무도 있다. 그러나 없다. 아닌가 있나.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없다고 했지. 그것은 진실. 진실은 있다. 있다는 거짓. 거짓은 있다. 있다는 진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없어. 그래서 몰라. 아무도 있어. 그래도 몰라. 정답은 있다. 거짓은 진실. 나는야 몰라 아무도 나야. 나는야 아무다. 누구도 나도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든.

 


네가 이 시를 외던 순간을 기억해. 사실, 이때 내가 놀랐던 건, 네 시의 난해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따분함을 넘어 아예 증오가 느껴지는 아이들의 시선 탓이었다. 타인과 타협할 수 없는 너의 자아. 그리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드러냈을 때 돌아오는 뾰족한 눈동자. 그것은 이질적인 것을 말살하려는 무기. 혐오.

 

이 시가 너의 비밀스러운 생각들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였음을 생각하면 비웃음이 나와. 이 정도로 우회한 진심도 거부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래서 나는 네게 다이어리가 숨길 수 없었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둘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것을 난 잘 알아. 나도 그랬었거든. 그러지 않게 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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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는 이제 ‘그곳’을 벗어난 지 오래야. 나는 네가 시를 욀 때 지켜보던 다른 여자애들과 같이 졸업을 하고, 더 큰 감옥으로 가게 되었어. 고등학교를 벗어난 이 아이들이 가게 되는 또 다른 감옥은 보통 대학교 혹은 일터야.

 

이 감옥의 악질인 여러 면 중 하나가, 고등학교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 졸업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조건부로 해방을 허락한다는 점에 있어. 그리고 이 조건은 어쩌면 단 한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을 때가 많은 것 같아. 사실상 나아진 게 없지.

 

네가 학교를 떠돌고 있는 것 역시 ‘사람의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너는 비밀을 너무 많이 품고 있어. 사람들은 너를 싫어하지. 비밀을 싫어하니까.

 

비밀을 가진 사람, 특히 비밀을 가진 여자애는 더욱 힘들다. 비밀의 무게가 엄청나. 사람들은 거기에 다른 이자를 붙여 무게를 불려 나가지. 저 애는 이걸 이야기하지 않으니 분명 저것일 거야. 저 애는 저것도 하는 동시에 그런 것까지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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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신과 시은.

 

 

시은과 너의 이야기가 슬픈 이유는, 비슷한 이야기가 이곳에서 아직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지. 서로 웃으며 장난처럼 진심을 섞어 평생을 기약하지만, 사실 불가능한 일이지. 이곳은 너무 자유로워서, ‘따가운 시선을 보낼 자유’까지 보장돼. 그건 여자애들이 너에게 보낸 뾰족한 시선보다도 더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고 상처가 되는 것들이야. 그걸 버티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내 주변에서는 하나둘씩 결혼 소식이 들린다. 그게 아니면 오래 함께할 짝을 만났다는 소식도. 그렇지 않은 경우엔 슬슬 짝을 찾아야겠다는 고민들까지도 들려. 너의 다른 친구들 역시 졸업을 하고 너를 잊어 흔한 누군가가 되어 있겠지. 너는 졸업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돌고 있구나.

 

사실 나에겐 너와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누구든 그 존재를 무의식중에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질적인 아이. 지나치게 빼어나면서도 비밀이 많은 아이. 딱 남만큼 비밀이 많은데도 굳이 그 비밀을 공개하진 않았던 아이… 그런데 소문은 불어났고 해명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은 채 우리는 졸업했어.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도 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가끔 그 친구도 학교에 갇힌 건 아닌지 생각을 해. 나는 가끔씩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볼 때가 있는데, 근황을 보며 친구들의 나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도 문득. 내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평생 나이 먹는 모습을 생각해 내지 못할 그 아이를 떠올리게 돼. 그 쉽게 그려지지 않는 이미지가 효신이, 특히 혼비백산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너의 표정을 떠오르게 해.

 

이미 말했듯, 바깥도 그렇게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야. 번번이 좌절되는 수많은 사랑을 생각하고, 채 해명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린 여자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이곳도 지옥이야. 평수가 더 넓어도 지옥은 지옥이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지? 시은이는 무언가를 포기해서 학교를 나올 수 있었는데, 그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은 네가 학교를 나오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답답함과 울분을 느낄 때면 학교에서 시간을 지킬 너를 생각해. 그러면 네가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며 다시 일어나게 되지. 오늘도 그런 날이었어. 홀로 너를 떠올리다가 홀로 결심했어. 네가 나올 날을 위해 오늘도 나는 무엇이든 해내야겠다.

 

네가 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미안해. 조만간 다시 너의 안부를 물으러 올게. 여기서 편지 마무리할게. 잘 지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인터뷰에서 밝힌 감독의 의도에서도 알 수 있듯 ‘괴담’이 아닌 ‘여고’에 방점을 둔 작품이다. 이것은 공포영화의 배경과 소품으로 존재하는 여학교를 그리는 게 아니라, 그곳을 드나드는 여학생을 주인공 삼아 그들의 내면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10대 여성 레즈비언으로 추정되는 효신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같은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그의 연인이던 시은은 정상성에 다시 편입하며 효신을 배신하는 선택을 하고, 이에 낙담한 효신이 투신하는 것 까지가 효신이 다니던 학교(그리고 평범한 여자애들인 민아, 연안, 지원이 다니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효신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갇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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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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