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날 이후로 잠에 들 수 없었다 -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 [공연]

글 입력 2024.03.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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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의 마지막과 2024년의 처음을 맞이하기 위해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가기 전 계획을 짜면서 처음에 꼭 끼워 넣자고 다짐했던 것은 바로 연극이었다.

 

뉴욕 하면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 하면 뮤지컬 아니겠는가. 그만큼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뮤지컬들이 관광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대신 브로드웨이에서 동떨어진 곳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열리는, 대사 한 마디 나오지 않는 무언극을 선택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희극 맥베스를 리메이크한 펀치드렁크 사의 연극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였다. <슬립 노 모어>는 관객들이 수동적으로 자리에 앉아 무대를 감상하는 기존의 관념적 위치에서 벗어나, 직접 공연의 한 요소가 되어 극에 참여하는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을 제시하며 유명해졌다.

 

<슬립 노 모어>는 의아할 정도로 약간 외진 곳에 있는 매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에서 공연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호텔일까? 매키트릭 호텔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호텔은 뉴욕의 최고급 호텔을 목표로 1939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이틀 째 되던 날 개장을 6주 남기고 호텔이 잠겼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슬립 노 모어>를 통해서 드디어 호텔 문이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허구다. 즉 매키트릭 호텔은 진짜 묵을 수 있는 호텔이 아니라 공연장의 컨셉이었던 것이다. 사실 매키트릭 호텔이라는 이름 또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에 등장하는 호텔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극장이 호텔이라면, 관객은 이 매키트릭 호텔의 숙박객이다. 우리는 입장하기 전, 줄 순서대로 “룸 키”인 번호가 적힌 트럼프 카드를 하나씩 받았다. 트럼프 카드에 써진 숫자는 사실 입장 순서를 표시하는 번호표이다. 극이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와중에 극이 진행되는 중간에 관객들이 차례로 들어오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해지는 겉옷과 극을 방해하는 핸드폰, 카메라를 비롯한 전자기기는 카운터에서 필수로 맡겨야 한다. 또한 몇 가지 자극적인 장면이 있기 때문에 성인만 관람 가능하다. 들어가면 재즈 공연과 함께 관객들이 칵테일을 주문할 수 있는 "맨덜리 바"가 있었다. 그리고 모두는 주의사항을 들으며 주어지는 하얀 가면을 쓰게 된다.

 



본격적인 극장에 들어가기 전 주의사항이 있다.

모든 관객은 하얀 가면을 쓴다. 

 

오직 배우들만이 가면을 쓰지 않는다.

관객은 말을 할 수 없다.

관객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선택받은 관객은 배우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원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며 그 중 한 명을 무작위로 중간에 밀어버리는 이벤트가 있으나, 아쉽게도 나는 마지막 타임이라 엘리베이터 없이 그대로 자유 입장했다. 입장한 공연장 안은 어두워서 꽤 으스스했고, 신비로운 향기와 함께 현실감 있게 꾸며진 100여개의 방들은 돌아다니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나는 두서없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여주인공인 맥베스 부인을 만나서 첫 연기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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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관객들은 배우의 동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배우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맥베스 부인이 읽은 편지를 우리가 들어서 읽을 수 있거나, 방금 전까지 배우가 앉아 있던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극의 한 가운데에서 배우와 똑같은 공간을 이용하면서도, 가면을 통해 관찰자로서 익명성을 갖는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극이 시작하자마자 모두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되도록 남자주인공인 맥베스, 여자 주인공인 맥베스 부인을 따라다니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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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공들은 씬이 끝나면 달려나가며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존 관객들을 성공적으로 따돌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서 대신 여러 명의 다른 서브 주인공들의 연기를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떠돌다가 2동 시간대 여러 장소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25개의 배역들을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었다.

 

관객들은 여러명의 배우들을 각각 따라다니다가, 배우들이 모이는 씬에서 다시 마주치고, 다시 뒤섞여서 각자 원하는 배우를 자유롭게 좆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특히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정신없이 주인공을 따라 뛰어다니다가 맞닥뜨린, 모든 주연 배우들이 모이는 마지막 만찬이었다. 발끝까지 소름이 끼치며 절대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다.

 

개인적으로 스포일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전에 리뷰 글 하나조차 보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같은 성향이더라도 예외적으로 <슬립 노 모어>에 한해서는 사전 정보를 최대한 모두 꿰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 이 점이 <슬립 노 모어>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딘가에 있는 주인공을 찾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 미리 모든 타임라인과 장소를 알고 가지 않으면 호텔 안에서 헤매다가 임팩트 있는 중요한 장면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쉽다는 것.

 

나는 주인공 맥베스의 극 스타트 시점과 몇 가지 주요 장면들을 놓쳐버려서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극이 끝나고 해석들을 찾아보면서, 꼭 실제로 봐야 한다고 유명한 씬들을 놓쳐서 꽤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이야기 플롯 전개가 크게 복잡하지 않고, 중요한 장면은 이미 알고 있더라도 실제로 볼 때 굉장한 충격이기 때문에 모르고 놓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알고 기다려서 관람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아쉽게도 연장된 올해 4월을 마지막으로 <슬립 노 모어>는 뉴욕에서 영영 종영한다. 하지만 새롭게 열린 상하이에서는 계속되고 있어서, 나 또한 언젠가 상하이에 가서 꼭 다시 관람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같은 배우들을 다시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상하이는 조금 더 가까우니까, 오히려 좋지!

 

 

[우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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