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행복이라는 형벌 [문화 전반]

글 입력 2024.03.0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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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행복의 시대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꿈꾸며, 행복을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는 시대. 행복한 삶은 좋은 삶으로 인정받으며 행복하지 않은 삶은 나쁜 삶으로 치부되는,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위해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시대다.

 

하지만 그렇게 신념처럼 외우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누구나 ‘행복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와 같은 뻔한 명제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와 닿을 수 없는 투박한 현실을 살아내고 있으므로, 우리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좇으면서도 그곳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소확행, 욜로(YOLO), 행복회로 등. 행복과 관련한 신조어가 쏟아져 나오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행복 지수는 역설적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34등을 기록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낮은 출생률과 높은 자살률을 동시에 달성하며 놀라울 정도의 지표를 갱신하고 있다. 격동의 근대사를 겪고 눈부신 성장을 기록한 대한민국이 이러한 불행의 지표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TED 강연에서 행복을 경험하는 두 주체 간의 차이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수만 개의 경험을 매일 자각하며 살지만, 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아주 소수이며, 무수히 많은 경험 중 각인된 소수의 기억만이 경험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이라고 지칭하는 관념은 상당히 복잡하며, 무엇보다도 그 관념은 우리의 기억이 정의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카너먼의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론 이해될 만하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경험이라도 그 끝의 짜릿한 성취감이 경험 전체를 미화하는 현상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의 미화는 단일하지만, 압도적인 마지막 경험이 나머지 수많은 경험을 대체하는 메커니즘을 따른다.

 

 

 

경험의 과정을 압도하는 기억은 없다 


 

하지만 과연 경험이 기억보다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험의 순간에 발견되는 소소한 행복들이 마지막의 압도적으로 불행한 기억보다 월등히 많다면, 그것은 과연 불행한 경험이라고 결론지어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경험 중 마지막 기억만이 그 경험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우선시하는 결과주의 담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결과주의적 행복론의 실패 사례로 문득 떠오르는 익숙한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 성장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이라는 불행의 지표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수단이 행복이라는 목적으로 도달하게 해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은 행복에 대한 기이한 담론을 형성하였고, 이는 한국을 치열한 경쟁사회로 만들었다.

 

중고등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 행복해지고, 대학생은 높은 학점과 좋은 스펙을 만들어서 좋은 기업에 들어가야 행복해지고, 사회인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혹은 명예를 얻어야 행복해진다는 믿음은 한국 사회 안에서의 서열 문화를 형성하였다. 경쟁에 지치거나, 혹은 집착하게 된 사람들은 양극단으로 멀어져 공동체의 형상을 잃은 지 오래다. 

 

행복하기 위해 성장하고, 행복하기 위해 경쟁하지만 결국 모두가 불행한 싸움을 하게 되는, 그런 기이한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예시를 통해, 결과주의적 행복론에 빠진다면 ‘행복’이라는 추상적이고 다원적인 개념을 오해하게 되고, 결국 그곳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일하고 압도적인 한 가지 개념 혹은 기억이 전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이렇듯 모순적인 문제가 있다. 

 

 

 

행복을 노력할 수록 불행한 이유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걸까? 앞서 언급한 행복에 대한 기이한 담론에서 얻은 교훈에 따르면, 행복을 추구하는 그릇된 인식이 '모두가 행복해야만 하고, 행복하지 않은 삶은 문제가 있다'라는 불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카너먼이 언급했듯 행복은 단일한 가치가 아니다. 행복을 복잡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고 긍정적인 감정은 좋은 것이며, 성공하는 것은 행복이고 실패하는 것은 불행이라는 인식. 모두 행복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오해들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라는 요즈음의 유행어처럼, 우리는 목표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에 만족하지 못한다. 심리학자인 에드거 카바나스는 이렇듯 도달할 수 없는 행복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항상 불행하다고 치부하는 현상을 ‘해피콘드리아(happycondrias; 행복 염려증)라고 정의한다.   

 

건강 염려증 환자처럼 해피콘드리아 환자는 자신이 불행하지 않지만, 적당히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를 두려워한다. 실제로 불행하지 않은데 불행하다고 느끼는 인간의 인식 오류에서 발생하는 자기 암시의 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행복이라는 가치에 너무 많은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행복과 나 자신 사이의 밀고 당기기, 그것이 행복으로 도달하는 열쇠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결론은 앞서 언급했던 ‘그럴듯한’ 행복 명제로의 회귀이다. ‘행복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진리 같은 그 말에 조금은 기대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루하루는 힘겹지만, 그런데도 종국엔 ‘그래서 어땠느냐’라고 묻게 되는 요즘. 너무 많은 것을 요약하려 하지도, 결론지으려고도 하지 말자. 행복이라는 거짓 가치에 갇혀 수억 개의 소중한 경험을 떠나보내지 말자. 

 

행복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무언가에 집착하는 인간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시시포스 신화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요즘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형벌과도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행복하지 않으면 안 돼, 행복하지 않으면 뒤처진 거야, 뒤처졌기 때문에 불행한 거야. 이런 자기 세뇌를 읊으며 오늘도 행복이라는 큰 돌을 이고 스스로 형벌의 길을 선택한 나와 우리 모두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언젠간 모두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지금 이 자체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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