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을 닮아가는 공간 - 따뜻한 대추차 [사람]

글 입력 2024.01.2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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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자기 사업을 일궈 나가는 분들을 보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취향이 담긴 공간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진두지휘해 나가는 사람들의 단단함이 특히나 빛났다. 그들의 가치관이 묻어나는 일터가 때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은 아니지만, 집 같은 편안함을 주는,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런 공간을 발견할 때 우리는 깊은 바닷속에서 진주를 찾은 듯한 기쁨을 느낀다.

 

그날은 여행 둘째 날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동네 카페에서 고소한 라테를 한 잔 마시고, 해변을 걷다가 숙소 침대에 잠시 몸을 기대어 쉬는 중이었다. 멀리 나가기에는 피곤하고, 근처에서 할만한 것이 있을까 열심히 검색창을 두들기던 중, 어느 찻집이 눈에 들어왔다. 흔히 소셜미디어에서 인기 있는, 화려하고, 최근의 트랜드에 부합하며, 사진이 잘 나오는 알록달록한 가게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예스러운 찻집이었다. 최근에 몸이 따뜻해지는 차를 마시는 것을 즐기는데, 진한 대추차가 일품이라는 후기를 보자마자 심장이 뛰었다. 마침 숙소와도 가까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장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찻집을 가기 위해서는 굽이굽이 골목길로 한참 들어가야 했다. 작은 책방, 낮은 돌담에 색색깔 고운 지붕 집, 낯선 이를 경계하여 짖는 영특한 개를 지나쳤다. 인적이 드물고, 큰 길가에 있지 않아, 우연히 이곳을 들를만한 손님은 없어 보였다. 알음알음 아는 사람만이 찾아갈 수 있는, 혹은 운이 정말 좋으면, 길을 잘못 들었다가 발견하게 될 것만 같은 위치랄까. 찻집 문을 살짝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현관이 나오고, 누군가가 거주하고 있는 듯한 생활의 흔적이 현관 곳곳에 묻어났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가 싶어, 돌아 나와 다른 입구가 있는지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자세가 아주 꼿꼿한 우아한 분위기의 사장님이셨다. 나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다시 그 입구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외투를 벗고 앉아있으니, 곧바로 웰컴 티가 나왔다. 우린 차를 잔으로 천천히 따르자, 쑥 향이 진하게 풍겼다. 먼저 뿜어져 나오는 쑥의 은은한 향기로움을 일정 시간 머금고, 천천히 목으로 들이켰다. 한참을 마시고 있는데, 다과상이 나왔다. 한입 크기의 고소하고 달콤한 떡, 찐득찐득한 단맛이 극대화된 귤 디저트, 곶감 호두 말이 등 다양한 식감과 맛으로 골라 먹는 재미를 줬던 한 상 차림은 깔끔한 차와 정말 잘 어울렸다.

 

주방에서 가스 불 켜는 소리,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주문한 차가 데워지는 소리였을까. 평소 식당에 가면 듣는 무수한 그릇들의 부딪힘 혹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 그 둘이 아닌 소리가 기분 좋게 나의 귀를 간지럽혔다. 차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사장님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곧 부엌에서 나온 사장님은 두 개의 대접을 한사바리 들고 오셨다. 어찌나 색깔이 진하던지, 나는 그것이 팥죽인 줄 알았다. 하지만, 팥죽에 들어가는 새알심은 보이지 않고, 잣이 몇 알 들어가 있었다.

 

막 끓여서 뜨끈뜨끈한 차를 들이켤 만한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 대신, 숟가락으로 후후 불어가며 한 수저씩 먹어보았다. 이제 팥죽이 아닌 건 확실해졌다. 달콤하고 진한 대추의 맛이 온 입안을 휘감았으니까. 내가 여태까지 먹어본 대추차는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갔다. 대추 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되직하고, 진한 맛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몇 숟가락 더 떠먹다 보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자리 잡은 그곳은 차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크게 뚫린 창으로 하늘과 바깥의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보였고, 사장님을 닮아 고고한 멋이 있는 자기들,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도 찻집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게 한편에 위치한 스피커에서는 김광석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조용한 찻집을 가득 메우는 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쓸쓸함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쓸쓸한 목소리는 꽤 다정하게 우리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다과상과 푸짐한 대추차를 보고,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을까 하던 걱정이 무색하게, 차와 공간과 시간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모든 게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온도에 익숙해졌을 때는 입을 데고 후루룩 마셔보는 대범함도 생겼다. 사장님은 살짝 무뚝뚝한 듯 보이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분이셨다. 차를 따라주시며 무심한 듯 다정하게 여행 일정을 물어보시기도 하고, 손과 발이 찬데 대추차를 마셨더니 온몸이 따뜻해졌다고 자랑하니, "대추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죠."라고 당연하듯이 말씀하시면서도, 원래 손발이 차냐며 사장님 방식의 걱정을 툭툭 던졌다.

 

단순히 맛만 좋았다면 나는 그 찻집을 사랑했을까? 잊을 만하면 계속 나오는 차와 다과, 사장님을 닮은 따뜻하고 진한 차, 그런 차와 어우러지는 깔끔하고 평화로워지는 공간. 나는 그곳을 잊지 못하고,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찻집 문을 다시 한번 기웃거렸다. 혹시 문을 닫은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다가, 현관에 누가 벗어둔 신발을 보고, 오늘도 찻집 문이 열려있음에 안도했다.


“오늘은 뭐 드시겠어요?”

나는 망설임 없이 웃으며 대답한다.

“따뜻한 대추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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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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