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짐승까지도 [공연]

글 입력 2023.12.15 13:4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곧게 뻗은 팔다리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누가 봐도 완벽한 바비 인형의 모습이다. 다양성을 반영해 여러 인종의 특징이나 장애를 가진 바비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인식하는 기본형의 ‘바비’는 역시 금발의 백인 여성이다. 영화 <바비>(그레타 거윅, 2023) 속 ‘마고 로비’처럼 말이다.

 

그 생김새처럼 다양한 베리에이션의 바비 서사가 존재한다. 앞서 소개한 영화는 바비들의 세상인 ‘바비랜드’에 살던 ‘바비’와 ‘켄’이 현실 세계로 가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바비랜드는 일종의 유토피아다. 아이들이 험하게 다뤄 망가진 바비부터 의사, 변호사, 인어와 대법관까지 실제 인형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여성 표상이 있다. 반면 켄은 그저 켄이다. 변변한 직업이나 명분도 없이 바비들을 따라다니며 말을 걸거나 데이트 신청을 할 뿐이다.

 

주인공 바비와 켄이 바비랜드와 현실 사이의 균열을 발견하면서 영화 바깥 실제 세계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 바비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바비랜드와 달리, 현실 속 여성은 직장과 가정을 비롯한 커뮤니티에서 갖은 차별과 배제를 당하고 있었다.

 

영화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투영되는 인형인 동시에 성인 여성의 신체가 관념화된 대상으로서의 바비로부터 페미니즘적 시각의 (그리고 다소 직관적인) 블랙 코미디를 이끌어 냈다.

 

 

영화-바비_1.jpg

* 영화 <바비>(그레타 거윅, 2023) 스틸컷

 

 

한편 또 다른 바비 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환상의 공간인 ‘바비 클럽’은 해마다 새로운 바비를 탄생시키며 공허한 세상 속 불행한 인간들을 현혹한다. 무대 위 바비들은 이전 삶의 기억을 지운 채 완벽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들은 춤과 노래, 자아와 아름다움을 팔며 관중과 스폰서의 선택을 받기 위해 살아간다.

 

바비 클럽을 운영하는 사장은 다름 아닌 ‘켄’이다. 바비랜드에서 허드렛일을 도맡던 그 켄이 아니다. 켄은 새로운 바비 후보를 물색하고 기억 제거술을 집도하며 이 거대한 환상의 공간이 현실 위를 굴러가도록 치밀하게 주도한다.

 

지난 9일 막을 올린 연극 <바비 클럽>(스튜디오212, 원작: 김수아)의 도입부다. ‘마텔’ 사의 인형 시리즈와 그레타 거윅의 영화로 익숙한 바비 이미지의 전복을 시도하는 발칙한 작품이다. 기존의 바비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의 표상이었다. 다양한 직업군의 바비 인형이 그러했고, 당당하게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딛는 영화 속 바비가 그러했다.

 

하지만 <바비 클럽>의 주인공 ‘바비 제니’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불행했다 짐작되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언뜻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켄의 조력 없이는 살 곳도, 살아갈 방법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스폰서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평생을 바비 클럽에 남아 어릿광대처럼 공허한 쇼를 이어 가게 된다.

 

 

바비클럽_무대.jpg

 

 

켄은 바비들에게 세 가지 규율을 제시한다. “생각하지 말 것, 재미없는 존재가 되지 말 것, 불행한 자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

 

이곳의 바비는 자아를 잃을수록 완벽해진다. 호기심이 많고 사색을 즐기는 ‘바비 모니카’가 켄에게 늘 꾸중을 듣는 이유다. 바비들은 자신의 과거에 의문을 품지 않고 오직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스스로를 무대 위에 올린다.

 

제니는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 “불행한 인간보다는 완벽한 짐승이 낫죠.” 주체성을 잃고 점점 더 완벽에 가까워지는 바비로서의 삶에 어느 날 수상한 기자 ‘프랭크’가 끼어든다. 그는 제니에게 조사 중인 사건의 공조를 부탁한다. 그가 품은 건 5년 전 무대 위에서 자살한 전설의 바비 ‘코토네’, 그리고 바비 클럽의 잔혹한 실체에 관한 의혹이다.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를 연상시키는 바비 클럽은 과연 어떤 실체를 감추고 있을까. 또 코토네의 죽음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걸까. 극은 이 물음들에 시원하게 답해 준다. 모든 의혹이 밝혀지고 무대에 오른 제니의 선택은 마지막까지 새침한 맛을 남기는 바비 서사의 완결을 알린다.

 

영화 <바비>의 캐치프레이즈는 다음과 같다.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바비 클럽>은 이 문장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짐승까지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곳이 나락이더라도.

 

새로운 바비 서사와 함께 지배적인 바비 이미지를 탈피해 참신해진 바비를 만나고 싶은 이들이라면 추천하는 작품이다. <바비 클럽>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고 극단 ‘각인각색’이 주관하는 차세대 예비예술인 발굴육성지원사업 ‘이음 & 창작 프로젝트’로 선정되어 지난 9일 막을 올렸다.

 

12월 21일부터 24일까지 북촌창우극장에서 정식으로 재개한다.

 

 

바비클럽_표지1.jpg

 

 

 

에디터 태그.jpeg

 

 

[김나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