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흐릿함 뒤에 선 관찰자,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 [도서]

글 입력 2023.10.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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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울 레이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식 회고록으로, 사울 레이터의 생애부터 흑백 및 컬러 사진, 패션 화보, 회화 작품 등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연대기적으로 종합하여 보여준다.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더라도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 예술가들의 특권이라고 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곳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만의 특징이다. 사울 레이터는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 중 가장 일상을 아름답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음과 동시에, 예술에 가장 밀접하게 동화되었던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사울과 다시금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이 책은,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내 안의 영감을 일깨웠고, 그로 인해 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순간이 들떴으므로 지금 작성하고 있는 이 글 또한 누군가가 그의 존재로 하여금 일깨워지도록 돕고, 동시에 감사한 그에게 바치는 작은 헌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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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내면화


 

뉴욕 '사울 레이터 재단'의 설립자 마깃 어브와 부이사장 마이클 파릴로가 엮은 이 책은, 사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쓴 책이다. 사울이 생전에 적었던 사진들과 함께 배치된 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느껴진다.


가장 내밀한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과 함께 했던 사울. 그는 평생 많은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진 않았지만, 필요한 만큼의 소수와는 깊은 감정 교류를 이루었다. 정통 랍비이자 사울도 화가가 아닌 랍비로 자라나길 원했던 아버지를 그의 비롯한 가족을 22살의 나이에 떠나,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갔을 때 사울은 눈치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가까운 사람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반하는 사랑은 없음을. 자신의 의지에 집중할 줄 알았던 그는 덕분에 평생 그 안의 예술을 표출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정말 꾸준히 작업했다. 마치 작업은 그냥 수단이고 예술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고, 우리는 방대한 양의 작품들과 함께 그의 미감을 추억하며 남겨졌다.


그에게 영감은 특별한 곳에서 번뜩이는 신기루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다. 로어 맨해튼에 위치한 집, 그 근처 몇 블록 안에서 생활하며 아름다운 발자취를 빼곡히 남긴 그에게서 내면의 일치와 창작의 관성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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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l Leiter / San Carlo Restaurant, 1952: Saul Leiter Foundation

 

 

 

흐릿함 뒤에 서있는 관찰자


 

그는 유난히 눈과의 상성이 좋다. 눈송이만큼이나 섬세하게 쌓여가는 사진들, 온도에 따라 유려하거나 절대 깨지지 않으며, 잡으려고 하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물과 얼음 같은 사람. 이러한 그 자체의 특징이 그의 사진 또한 지나치게 한 피사체에 치우치지도, 초점이 없지도 않게 만든다.

 

그가 렌즈 앞에 덧대 보는 유리창 또한 흐릿하다. 희뿌옇고 덜 닦인 틈으로 모인 순간이, 그에게는 영원이 비친다. 매일의 화양연화가 그렇듯, 희망과 우울도 같이 느껴진다. 희뿌여면서도 선명한 색채들. 수채화 같은 그와 그의 작업.


사실 별거 없는 모나리자의 웃음처럼, 기어코 사울은 ‘1950년대 뉴욕’이라는 단순한 두 글자의 조합을 특별하게 만든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모르는 순간에 며칠일지 모르는 한 하루가 눈과 함께 소복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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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l Leiter / Snow, 1970: Saul Leiter Foundation

 

 

 

거울에 비치는 우리


 

그는 프레임의 사면 경계를 뒤흔들어 마음껏 상상하게 한다. 작품에 몰입하다 보면 점차 사진과 현실의 경계가 지워지고, 사울의 사진은 흡수되어 일생에 잔상으로 남는다. 단순한 거리를 낭만으로 가득 차게 하고, 인생을 '나'의 각도가 아닌 다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유일한 자의식을 넘어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어느 지붕과 지면 틈 사이, 고가 도로 위에서의 측면에서 일상을 관찰하게 한다. 나를 투영하는 거울이 아닌 타인을 투영하는 거울은 같은 풍경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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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l Leiter / Blue Skirt, 1950s: Saul Leiter Foundation

 

 

 

야심 없는 야심에 찬 예술가


 

우리는 강렬함을 향해 몸부림친다. 뇌리에 남는 인상을 위하여, 더 많은 이들의 인정을 위하여, 그렇게 더 자극적이고 짜릿한 성공을 위하여. 바쁘고 빈틈없는 현대인, 정교하게 연출된 순간들에 열광하며 보이지 않게 합의한 완벽을 향해 달려가지만, 사실은 그것이 허깨비이고 흐릿함이 전부다.


흐릿하게 은은한 매 순간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출근하는 사람들이, 섬세한 화장 후 화보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기 전의 우리가, 꾸며도 되지 않는 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는 닦기 직전의 유리창, 빗방울이 맺힌 창문과 같이 흐리다. 그리고 그 흐릿함 뒤에 서 있는 관찰자가 사울이다.


침범하지 않은 채 가장 내밀한 감정을 이해해 주는 작가. ‘미상(Unknown)’으로 불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가. 지나칠 수 없는 그 순간을 담는 그와 함께면, 때로 나에게서 그를 본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미상의 예술가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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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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