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21. 케이팝을 들으면 나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글 입력 2023.12.1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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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케이팝


 

2019년, 전 세계가 방탄소년단(BTS)에 열광할 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 내가 매일 그들의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들었던 건 일반적인 ‘팬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그들의 대표 메시지, ‘Love yourself’에 감동해서였다. 방탄소년단은 2017년 9월 LOVE YOURSELF: 承 ’Her’를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2018년 5월 LOVE YOURSELF: 轉 ‘Tear’과 같은 해 8월 LOVE YOURSELF: 結 ‘Answer’을 내놓으면서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의 연작 앨범을 완성했다.

 

“왜 자꾸만 감추려고만 해 네 가면 속으로 /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자린데” - ‘Answer: Love Myself’ 中

 

같은 가사를 자기혐오로 점철된 상태에서 들으면 누구든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때 나는 자신을 싫어하던 이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건 마법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존감’은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준말로,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나 태도를 말한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자아존중감이 높고, 반대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자아존중감이 낮다고 분류된다. 한평생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못난 인간이라고 여겼다. 언젠가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자존감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자기혐오 때문에 왜곡했을 뿐, 실은 나도 못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제시했다.

 

점점 케이팝(K-POP)에는 자존감 높은 화자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2000년대에도 원더걸스의 ‘So Hot’처럼 자신의 매력에 도취한 가사의 노래가 있었지만, 그 자신감은 외모에 한정돼 있었다. ‘왜 자꾸 쳐다보니 왜’라는 도입부의 가사에서 드러나듯이 남들에게 선망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 부분이 강조된다. 그러나 데뷔곡부터 ‘예쁘기만 하고 매력은 없는 애들과 난 달라’(‘달라달라’ 中)라며 줄곧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는 있지부터 ‘Narcissistic, my god I love it’(‘LOVE DIVE’ 中)라며 물가에 비친 자신에게 사랑에 빠져 물에 뛰어든 신화 속 인물 나르키소스에 본인을 대입하는 아이브, 거기에 시련을 겪으면 오히려 강해진다는 (‘ANTIFRAGILE’) 르세라핌까지, 그들이 표현하는 자존감의 양상은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솔직하게 긍정하는 형태로 완성된다. 올해 5월에 발매된 아이들의 ‘퀸카 (Queencard)’는 특히 직접적이다. 자신이 예뻐졌다는 착각을 계기로 본인을 사랑하게 된 인물이 나오는 영화 <아이 필 프리티(I Feel Pretty)>를 모티프로 완성된 이 곡은 현대인의 외모 콤플렉스를 다룬 노래 ‘Allergy’와 함께 발표되어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신의 외모를 긍정하라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제시했다.

 

여느 날처럼 아이돌 무대 영상을 보며 그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그보다 더 화려한 외모에 심취하던 내게 이런 의문이 싹텄다. 과연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본인들의 노래 속 화자처럼 자신을 긍정할까?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대중은 나노 단위로 그들을 평가하고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청년 멤버들은 그 수많은 잣대에 본인을 끼워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남 눈치 안 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동시에 항상 환하게 웃어야 하고 몸은 날씬해야 하고 실력은 완벽해야 한다. 특히 이 잣대는 여성 아이돌 멤버에게 더욱 가혹한데, 이미 표준체중에 한참 못 미치는 그들을 향해 악의적인 캡쳐 화면을 근거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기준의 몸매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아이돌이 직접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를 담은 티빙(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에서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케이팝의 메시지가 바디 포지티브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내 눈에 비친 자존감을 노래하는 아이돌들은 모든 조건에서 완벽을 추구한 끝에 본인을 찬양하는 모습이었다. ‘퀸카 (Queencard)’는 뮤직비디오에서 성형 수술을 포기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마르거나 살찐 Girl 퀸카’라는 후반부 가사를 통해 어떤 모습이든 누구나 자신의 퀸카라는 메시지를 던지지만, 대중에게는 이미 예쁘고 날씬한 그들이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전반부만 각인될 뿐이다. 후반부가 각인되어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가 ‘외모를 긍정하라’라는 것에 그친다면 케이팝의 외모지상주의에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케이팝 아티스트의 완벽한 외모는 무대 밖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언젠가부터 걸그룹의 미적 기준은 날씬함을 넘어 ‘마른’ 것이 되었다. 아동복과 같은 수준의(실제로 가수 전소미는 아동복을 무대 의상으로 입은 적이 있다고 방송에서 언급했다) 옷을 소화할 만큼 마른 멤버의 사진을 두고 그들처럼 되기 위해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10대 청소년의 수가 적지 않다. 어쩌면 케이팝이 말하는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긍정할 만큼 완벽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나’를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


 

자존감 키워드는 케이팝에서만 성행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표 서점인 교보문고의 공식 사이트에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1,902건의 검색 결과가 나오고, 예스24 사이트에는 1,427건의 검색 결과가, 알라딘 사이트에는 800건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오프라인 서점을 거닐다 보면 에세이와 심리학 코너 매대에 자기 검열로 지친 현대인을 위로하는 책들이 가득 찬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SNS에도 남을 배려하느라 자신을 갉아먹는 이들의 마음을 감싸주는 글귀들이 수시로 업로드되고, 전문 심리학자가 전하는 자존감 높이는 법을 다룬 영상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자신의 자기혐오를 극복한 사례를 말한 영상들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과거 한국에는 소수자를 향한 혐오 발언을 경계하는 시선도 없었고, 가정과 학교에서 이뤄지는 폭력은 모두 훈육으로 치부됐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라는 속담처럼 공동체에서 ‘튀는’ 모습을 한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감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겸손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과시는 모난 것으로 여겼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내용의 폭언을 그대로 흡수하며 자랐던 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에 위로받는 건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존감이 몹시 복잡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 담론은 아주 평면적이다. 우리는 단순히 외모나 성격 같은 몇 가지 잣대로만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나’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끝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내가 추가로 싫어질 뿐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게 뭔지, 나를 꼭 사랑해야 하는지, 나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타인도 존중할 수는 없는지와 같은 고민이 담겨 있지 않은 채 던지는 ‘나를 사랑하라’라는 외침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자존감과 비슷한 단어로 자기애가 있다. 사전적으로 자기애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우리는 이 용어가 정신분석에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자기애는 리비도(욕망)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상태로, 정상적 자기애와 병리적 자기애로 나뉜다. 정상적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구조적으로 통합되어 있고, 외부 대상과의 관계가 안정적인, 우리가 원하는 자아존중감이 높은 상태를 의미한다면, 병리적 자기애는 타인의 갈채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완벽을 추구하고, 자신의 특별함을 과하게 맹신하며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사회는 정상적 자기애와 병리적 자기애를 제대로 구별하고 있을까? 내 아이만 특별하다는 방향의 교육, 판매자를 찍어 누르는 소비자의 갑질, 건설적인 비판도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진행되는 논쟁. 이러한 사회가 진정 자존감이 높은 사회인 걸까? 우리는 모두 특별하다. 그 말은 모두 평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연이라면, 남의 인생에선 조연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협소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향한 사랑만 키워서는 안 된다. 자신은 물론 타인을 받아들이는 그릇부터 키워야 한다. 이러한 고민 없이 진행되는 자존감에 대한 논의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만들 뿐이다.

 

 

 

케이팝 리스너인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내가 방탄소년단의 노래에서 위로받았던 건 자신에게 찬사를 던지는 가사가 아니라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영영 사라지고 싶은 날’(‘Magic Shop’)이라거나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네가 내린 잣대들은 너에게 더 엄격하단 걸’(‘Answer: Love Myself’)과 같이 뿌리 깊은 자기혐오를 인식하는 가사였다. 세계적인 스타인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혐오를 경험할 만큼 평범한 그들이라서 좋았던 거였다.

 

2022년에 내게 가장 큰 위로를 준 노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Anti-Hero’였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노래를 통해 스스로 ‘영웅답지 않은 영웅(Anti-Hero)’이라고 칭하며 뿌리 깊은 자기혐오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세계 최정상 아티스트도 예외가 아닐 만큼 자기혐오가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이 내게 큰 위로였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솔직한 고백은 이 세상에 ‘객관적으로’ 못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노래에 위로를 받아왔다. 그러나 케이팝의 당당한 화자들에게는 나를 대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수시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나를, 칭찬은 축소하고 비판은 확대하는 나를, 남 눈치 보느라 사소한 행동도 마음대로 못 하는 나를, 남의 의견을 수용하느라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나를 알아볼까? 그렇게 완벽한 그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까? 그들처럼 완벽하지 않은 나도 나를 사랑해도 될까? 아무리 많은 음악을 듣고, 무대 영상을 봐도 나의 이 질문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아이돌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옛날엔 멋진 어른으로만 느껴졌던 이전 세대의 아이돌도 뒤늦게 그들의 나이가 되어 보니 활동 당시 얼마나 어렸는지 실감하게 된다. 아무리 그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막대한 수입을 거둬도 연민의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대다수 아이돌이 활동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시기는 맹목적인 사랑과 맹목적인 비난을 감당하기에 턱 없이 어린 나이임을, 그 시기를 지나온 뒤에야 뼈저리게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화려한 무대 뒤의 그들이 궁금하다. 항상 완벽한 외모를 유지하느라 진이 빠질 그들이, 예상할 수 없는 대중의 반응에 고뇌하는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일을 수행하는 그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다. 청자를 경쟁자나 악플러로 설정하지 않고, 당신들처럼 완벽해지고 싶은 나로 설정한 노래가 듣고 싶다. 그런 노래를 듣는다고 해서 내가 나를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나까지 싫어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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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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