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아있음'의 기준은 무엇일까? - 서울인디애니페스트 2023

글 입력 2023.09.2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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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Animation)은 ‘생명을 불어넣다’, ‘활기를 띠게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Animatus에서 기원한 단어다. 즉, 그림, 인형 등의 무생물에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어 인간처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동적인 존재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흔히들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보편적인 정의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러한 경계를 초월해 주객이 전도되는, 다시 말해 인간들이 자신의 퇴색된 혹은 망실된 감각들을 도리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와 서사를 통해 되새기고 생명력과 활기를 되찾는 데까지 이른 듯하다. 여기서의 생기는 단순히 호흡하고, 말하고, 걷는 신체적인 ‘살아있음’에서 나아가 건설적인 삶을 지향하는 정신적인 ‘살아있음’까지 닿는다. 우리는 지금 유생물과 무생물의 경계 뿐 아니라 유정물과 무정물의 경계 역시 모호해진 시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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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3에서 접한 작품들과 이어 마련된 토크는 무뎌진 감각들을 자극하는 작품들로 꾸려져 있었다. 그중 내가 현장에 방문해 감상한 건 해외 초청작 섹션의 <강렬한 기계의 진동을>과 국내 신진 감독들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갈무리한 <새벽비행2>였다.


먼저 상영된 <강렬한 기계의 진동을>은 미국의 SF 작가 마이클 스완윅이 1988년 발표한 을 각색한 작품으로, 두 우주비행사가 목성의 위성 ‘이오’에 착륙하는 도중 참사로 부조종사 ‘버턴’이 사망하자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 ‘마사 키블슨’이 그녀의 시신을 싣고 기지로 향하는 도중 마주하는 풍광들을 섬려하게 스크린에 옮긴다. 극중 부상의 통증을 견딜 수 없던 마사 키블슨은 환각 유발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한다.

 

고통은 줄었지만, 그때부터 그녀는 버턴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과 버턴의 시신을 본뜬 조각상에 압도되는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정신을 붙들기 위해 대화를 거는 음성에 반응한 마사는 이오는 사실 기계이며, 시신을 운반하며 발생된 마찰로 인해 이오의 시스템이 부팅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기절한 마사는 시신은 사라진 채로, 절벽 위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이때 이오는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면 신체는 분해될지언정 정신은 보존될 수 있다며 그녀를 유인하고, 산소부족으로 곧 죽을 위기에 처한 마사는 그의 말에 따라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이후 영화는 마사의 형체가 뭉개져 빛을 발산하며 행성 전반에 큰 진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상당히 모호한 전개와 결말이다. 진통제로 인한 부작용일지 혹은 마사 키블슨의 추측대로 실제 이오가 위성의 형상을 띤 거대 기계였을지 작품은 관객의 해석에 맡긴다. 전자라면 마사 키블슨은 황량한 대지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테고, 후자라면 이오와 공생하게 되었을 테다. (혹은 시스템 가동을 위해 마사 키블슨을 재물로 삼고자 했던 이오의 꾐이었다면 존재 자체가 무화 되었을 수도.)

 

상상이야 얼마든 가능하지만, 내가 피력하고 싶은 건 그러한 스토리 자체에 대한 해석보다는 기계와 인간, 삶과 죽음이 한 차원 안에서 순환하는 과정을 이미지로 흡인력 있게 축조해 낸 감독의 역량이다. 물론 원작 자체가 워낙 무흠한 명작이라 그에 진 빚도 있겠지만, 이를 형상화하고 재가공하는 테크닉에 있어서는 감독인 에밀리 딘의 공이 분명 컸다고 생각한다.


사실 본 작품은 넷플릭스의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3의 한 에피소드로 이미 공개된 바 있다. 작품성과 독창성을 고루 갖춘 프로그램으로 명성이 자자한 지라 <러브, 데스 + 로봇>에 작품이 실리는 것만으로 감독은 테크니션 그리고 크리에이터로의 실력을 공인받는 셈이다. 실제로 에밀리 딘은 픽사, 워너 브라더스 등 해외의 유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스토리 아티스트, 비주얼 컨설턴트로 참여한 이력이 있는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토크에서 그녀는 작품에 대한 상세한 부연보다도 자신이 지금의 커리어 하이를 달리기 이전의 비하인드를 짚어가는 데 더 주력했다. 현재로서는 유망한 애니메이터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사실 꿈을 실현하기까지 그녀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에밀리 딘은 자신만의 견실한 뚝심이 있었다. 변호사가 되길 바랐던 부모님의 반대에 그녀는 곧바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기보다 작은 단편 영화를 직접 제작해 자신의 열정과 가능성을 내비쳐 그들을 설득했고, 아버지의 알츠하이머로 침체되었던 시기에 그녀는 당시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내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작품을 세계에 선보였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러하듯 그녀의 삶에도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그녀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그 지난한 시간을 건너왔다. 그리고 현재는 다양한 필모와 세계적 마니아층을 보유한 감독으로써 강연을 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토크가 거의 막바지에 달할 무렵에는 마사 키블슨과 에밀리 딘이 중첩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환각과 발 딛고 있는 현실 사이에서 그녀는 마사 키블슨처럼 그 안에 섞여 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다음으로는  <새벽비행2>에 속한 무려 열한 점의 작품을 감상했다. 신진 크리에이터들의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꼽는 섹션답게 비교적 어린 연령대의 감독들이 많아 보였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프로젝트 작품이나 대학교 졸업 작품도 다수 있었다. <강렬한 기계의 진동을>이 잔뼈 굵은 감독이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구축해낸 SF 장르물이었다면, 금번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와닿는 일상을 배경으로 서사를 풀어가는 드라마물이 대부분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음울한 테마를 끌어오더라도 그 기조에는 휴머니즘이 존재했고, 어른들을 울리는 진중한 드라마도 있는 한편, 역동적이고 발랄한 감성을 소유한 오락물도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기보다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작품 몇 점을 추리면, <방과후, 1교시>, <미끼>, <별별지구탈출쑈>가 유독 좋았다.


<방과후, 1교시>는 감정 표현 불능증으로 타인의 표정을 읽는 데 유독 어려움을 겪는 초등학생 ‘기동’이 학급 내 똥침 사건을 바탕으로 친구들의 다양한 표정을 연구하고 따라 하며 소통하는 방식을 배워가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극중 기동처럼 각자만의 결함, 단점은 누구나 갖기 마련이지만 주변인의 관심과 애정이 동반된다면 충분히 극복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서정적인 메시지를 스톱모션 특유의 생동감과 활기 넘치는 분위기로 그려냈다.


 한편, <미끼>는 현대인들의 고질병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기원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지친 머리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동안 남은 신체는 다시 머리와 화해하기 위해 사과의 편지를 미끼로 던진다. 이내 머리가 이를 받아들이고 머리와 몸은 다시 접합된다. 스스로를 혹사시킬 정도로 생각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는 모두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게끔 한다.


끝으로 <별별지구탈출쑈>는 타이틀에서 이미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듯, SF물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을 요한다기보다는 도리어 철학적인 질문을 건네는 작품이다. 극의 시공간적 배경은 해수면 상승으로 대륙 대부분이 물에 잠긴 근 미래의 2073년 지구. 화성으로 도망간 박사님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두 명의 조수는 어느 날 우연히 해양에서 기이한 보석 하나를 줍게 된다. 이윽고 그 주인인 외계인들이 그들을 찾아오고, 두 조수는 보석을 돌려주는 대가로 화성에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하고 탈출에 성공한다.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더라도 서로 맞잡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낭창한 감각으로 구성했다. 유례없는 팬데믹 그리고 팬데믹 그 자체보다 더 위급했던 사회적 갈등과 파장들을 한 번 경유하고 난 시점인지라 그 메시지가 유독 귀하다.


터치, 분위기 모두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는 현대인들이 절감하고 있는 보편적 사안들을 길어올린다. 소통의 가능성과 중요성,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용, 공동체 의식 등. 잊고 외면했던 사안들을 조망하며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려는 곡진한 노력들 덕에 적어도 그날 하루는 ‘살아 있음’을 감각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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